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12. 10:21

사랑이 뭐길래

(요한일서 3:11-24)
 

1. 사랑이 뭘까? 사랑이 뭔지 묻는 일은 어찌보면 낭만적인 것 같고 한가한 사람들의 사색 같지만, 사랑에 대해서 묻는 것만큼 인생과 신앙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물으면 우선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생각부터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감정적인 차원(사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할 때, 육체의 접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말할 때 ‘에로스’에 대하여 떠올린다.

 

2. 우리가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일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8).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 더불어서 우리는 아가서를 떠올리며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을 가장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성경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 부르기도 한다.

 

3.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세우실 때, 친형제 사이였던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 3:17).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은 좀 더 쉬운 말로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르지만, 우리가 만약 대면하여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만났다면, 그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가장 친근감을 느꼈을 것이다. 둘은 성격이 화끈(시원시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화끈하게 살았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열 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은 야고보(James)였다. 화끈하게 복음을 전하다 화끈하게 죽었다.

 

4. 요한은 보통 예수님의 ‘애제자’로 불린다. 예수님이 요한을 편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야곱이 열 두 아들 중 요셉을 편애했듯이, 예수님도 요한을 편애했다. 이것을 나쁘게 볼 필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왠지 좋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요한의 평생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줄곧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the beloved disciple)’라고 칭했다. 요한복음에 이 표현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요 13:23, 19:26, 20:2, 21:7, 21:20).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면서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신다.

 

5. 사람이 죽을 때 하는 세 마디의 말이 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또한 사람은 치매가 걸리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이나 가장 좋았던 기억에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기도 한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노년의 요한은 아주 약해지고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교회 모임에 들것에 실려 왔다고 한다. 그때 모임에서 요한은 언제나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을 계속하여 속삭이곤 했다고 한다. 그의 인생 가운데 ‘사랑’이 얼마나 강력하게 그의 삶을 지배했으면 죽어가는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계속했을까.

 

6.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성격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사랑/또는 사적인 사랑’이 아닌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절).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사랑은 ‘감정/감성적 용어’라기보다 ‘신학적 용어’라는 것이다. 성경의 사랑은 그냥 인간의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랑’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것을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감정놀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복음과 관련된 것이다.

 

7.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망(죽음/악)에서 생명(선)으로 옮겨졌다는 선포이다. 이것을 골로새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예수)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우리는 흑암의 세상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갔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죽음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다는 증거, 우리가 흑암의 나라(악한 세상)에 있지 않고 아들의 나라에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처럼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8. 나는 ‘사랑’만이 모든 것의 자격(qualifications)이 되는 이 아들의 나라, 생명의 나라가 너무 좋다. 그 나라에서 살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쓴 정현종 시인처럼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아들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 가고 싶다.” 우리는 사랑 외에, 이런 저런 자격을 갖추느라 너무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자기계발하느라 사랑할 시간도 없다. 무엇을 위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생명을 낭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9.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의무라는 게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민의 4대 의무가 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가 그것이다. 이것은 헌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에서 사는 한 누구든지 지켜야 하는 의무이다. 이 의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이것이 감정의 문제였다면, 군대를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안 가도 될 것이다. 세금을 내고 싶은 사람은 내고 내기 싫은 사람은 안 내도 될 것이다.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은 받고 받기 싫은 사람은 안 받아도 될 것이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일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했다고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10. 그러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4대 의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우리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군대 가는 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세금을 내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교육도 근로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더불어 사회적 왕따를 당한다. 병역문제, 납세문제, 교육문제, 근로문제 등은,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감자다. 이 네 가지의 의무는 그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의 표지이다. 그래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의무를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그는 공동체의 정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4대 의무는 사적 영역에 있는 게 아니라 공적 영역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1. 요한 공동체(교회)의 자기 이해는 무엇일까?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로,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그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자매들을 돌봤다. 또한 처음부터 들은 소식(복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듯이, 그들도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감정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복음에 근거해서 행했다. 그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신앙생활을 사적으로 하지 않고 공적으로 했다는 뜻이다.

 

12.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 그렇게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3-24절). 아들의 나라에는 헌법이 한 가지 있는데, 그 헌법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이다. 전혀 복잡하지 않다. 많은 헌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 한 가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헌법이다.

 

13. 우리는 공부 많이 한 사람, 또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스펙이 좋은 사람이 연봉 많이 주는 직장에 들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돈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 많이 한 사람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고 돈 많이 벌고 오래 살고 가장 행복하면 그리고, 죽어서도 천국가는 게 보장되면, 아마도 서로 사랑하느라 혈안일 것이다.

 

14. 실제로 중세시대 때 이러한 비슷한 생각이 유행했었다. 중세인들은 사후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죽으면 천국 가는 것에 대한 큰 열망이 있었다. 즉, 구원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러한 중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공덕(merit)’에 대한 신학이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죽은 뒤에 천국 가는 것, 즉 구원받는 일이 넉넉히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쌓은 공덕으로 공덕을 쌓지 못하고 죽어 연옥에 있는 일가족도 대신 구원할 수 있었다. 공덕을 쌓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인의 유물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돈이 있었기에 성인의 유물을 많이 모았다. 또 한 가지, 가난한 자들(거지)에게 은혜를 베풀면 공덕을 쌓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가난한 자들(거지들)은 매우 큰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들의 가난 덕분에 사람들이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사성찬례(미사)에 참여하여 성찬례(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를 많이 받을수록 공덕이 많이 쌓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곳의 교회에서 미사가 끝난 뒤 다른 교회로 달려가 그곳에서 또 한 차례의 성찬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면벌부를 사는 것이었다. 면벌부를 사면 공덕을 쌓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연옥에 갇혀서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면벌부를 팔러 다니는 사제단(테첼)은 이런 문구를 가지고 다녔다. “금고에 넣은 동전이 짤랑거리면,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

 

15. 이 세상이 아들의 나라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기준에 의하여, 또는 나쁜 짓 많이 하는 사람이 오히려 잘 먹고 잘 살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한 악한 세상에 저항하며, 우리가 그러한 악한 나라, 어둠의 세상, 죽음의 나라를 떠나 의의 나라, 생명의 나라,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당당히 드러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 스스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부지런히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셨다”는 복음은 그래서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중요(crucial)하다.

 

16.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또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다른 말로, 기독교의 사랑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공적인 섬김이다. 마음 내키면 하고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랑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야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 사랑을 받아, 그저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 기억(아남네시스)은 바로 예배에서 일어난다. 예배는 기억의 자리이다. 우리는 들리는 말씀(설교)을 통해, 그리고 보이는 말씀(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예배에 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선물로 받아, 세상에 나가서 정신차리고 ‘사랑’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한다.

 

17. 요한공동체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는 진리를 거부하며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겼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헌법)을 지키지 않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진리가 거절당하고 신앙의 공공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진리를 거부하고 신앙의 공공성을 무너뜨린 이들을 향하여 ‘적그리스도’ 그리고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세상, 서로 사랑하지 않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헤치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볼 때, 요한 공동체(교회)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이다.

 

18.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 물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물음은 그치지 말아야할 물음이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죽음의 나라/어둠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나라/아들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신앙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공적 섬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이 헌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에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끄시는 삶의 신비이다.

 

19.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라.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들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아멘. 아멘.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