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2. 04:45

사명이 없어도 괜찮아

(출 3:1-12)

 

1. 몇 번을 봐도 신비한 장면이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일이 정말 가능한가? 잘 믿기지 않는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이기도 하고 인생에 있어 가장 영광된 순간 아닐까 싶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그리고 가장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다가서려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2.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 십상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이렇게 읽어내는 것도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으나, 때로 이러한 해석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 못하고 웅크리게 하기도 한다. 죄, 부족함이라는 말은 우리를 겸손한 존재로 만들기 보다 위험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어차피 그런 존재야, 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을 가진 존재로 말이다.

 

3. “가까이 오지 말라, 신발을 벗으라”는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절규가 들린다. “주님,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쉬지 못하며 산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계속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 바라는 것,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것, 그래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쉼은 묘연한 것이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증명하려는 모세를 멈춰 세우신다. 그리고 신발을 벗기신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증명해야 할 것이 더 이상 없다. 불필요하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필요도 없다. 있는 그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은 모세를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발까지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더 이상 가야 할 길이 없으니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쉼, 안식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단한 모세의 인생에 쉼을 주신다.

 

5. 우리가 얼마나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쓰며 산다. 모세가 그랬다. 그는 이집트의 왕자로 왕궁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쓰며 살았다. 그러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를 쓰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너 자신을 나에게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며 산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피곤하게 만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존재가 증명되지 않으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세상. 말 그대로 피로사회다.

 

6.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던 이집트 왕궁에서의 삶과는 달리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은 모세에게 훨씬 더 가벼웠을 것이다. 뭔가를 증명해야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채우는 일이다. 뭔가 있어야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뭔가를 증명할 필요 없는 일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비워냈기 때문에 특별히 보여줄 게 없다. 그렇게 모세의 시간은 흘러간다. 출애굽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큰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모세의 삶 속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사건이 발생한다.

 

7. 평소와는 달리 모세는 광야 서쪽으로 양 떼를 몰고 갔다. 우리말로는 ‘광야 서쪽’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는 ‘광야 서쪽’이 단순히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세가 평소에 다녔던 길이 아니라 미디안 지경을 벗어난 새롭고 낯선 먼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말이 ‘광야 서쪽(아하르 하미드바르)’인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이야기가 진행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정도의 긴장감을 뜻하는 말이 될 것이다.

 

8. 광야 서쪽으로 가서 모세가 도달한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이다. ‘호렙’은 어원상 ‘폐허’ 또는 ‘흙더미’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 호렙산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이러하신 분이라는 것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별히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닌 여인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비천한 종’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곳,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소식은 천사에 의하여 아무것도 아닌 자들인 목자들에게 먼저 알려졌다.

 

9.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곳,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고, 모세가 아무것도 없는 곳(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안다면, 큰 것, 화려한 것, 놀라운 것에만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향해서도 늘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작은 것, 누추한 것, 별볼일 업는 것을 업신여기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10.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도시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면 모세는 그것을 알아보았을까. 화려한 네온사인에 비하면 불타는 떨기나무는 초라하다. 아무것도 없는 호렙이니 불타는 떨기나무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독교 영성은 비워내기에 집중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느라 성전의 장식이 화려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화려한 성전을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간 은둔 수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 요한 아닌가. 요한복음에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정체를 물었을 때, 요한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 1:23).

 

11.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이집트 왕궁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광야였다. 이집트 왕궁에 있었을 때 모세는 나름대로 ‘사명감’이 넘쳤었다. 동족 이스라엘의 아픔이 눈에 들어왔고,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동족의 아픔을 해결해 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다. 사명감없이 어떻게 모세가 사람(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다툼을 향한 그의 개입은 우발적인 게 아니라 계획적이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 그 사명감 때문에 이집트 왕궁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신세가 되었다. 이제 모세에게는 아무런 사명도 없다. 그냥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들을 돌보는 평범한 목동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12. 우리는 때로 왕궁에 있었던 모세처럼 사명 콤플렉스에 빠지곤 한다. 한 때 한국교회에서는 ‘사명 선언서 쓰기’ 붐이 인 적 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래서 그때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명 찾아 삼만리를 떠나야 했다. 사명은 좋은 것이다. 사명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사나. 그런데 문제는 사명이 없으면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교회가 아닌 것처럼, 사명 콤플렉스에 빠져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데 있다.

 

13. 사명에 불타 살았던 왕궁 시절과 사명 없이 살았던 광야 시절 둘 중에서 모세에게 어느 시절이 더 행복했을까? 모세의 왕궁 시절은 모세에게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시절이었다. 사명 때문에 자기의 삶을 잃어버린 시절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광야 시절은 모세에게 사명은 없지만 삶은 있는 시절이었다.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시절과 사명은 없지만 삶이 있는 시절 중 어느 시절이 더 행복할까? 너무도 자명하지 않는가. 사명은 없지만 삶이 있었던 광야 시절이 더 행복했다.

 

14.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 사명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말라.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사명보다 삶이 중요하다. 모세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준다. 삶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세의 왕궁 시절은 모세에게 비참한 결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사명은 없었지만 그냥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던 모세의 광야 시절은 모세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 모세는 아무것도 없는 곳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사명감에 불타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냥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신 것이다.

 

15. 우리는 본문에서 많이 성장한 모세를 만난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밝히 드러내신다. 계시의 순간이다. 감추어진 일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애굽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겠다는 구원 계획을 밝히신다. 그리고 바로 ‘너 모세’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모세였다면, 그 말을 들은 즉시, ‘아멘’하면서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16. 내가 누구이기에. 미 아노키. Who am I? 마음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대답이다. 하나님에게 대하여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성숙한 모습이다. 모세는 왕궁에서 살면서 어쩌면 이 질문을 한 번도 진지하게 던져보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모세는 이제 광야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모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3장에서는 모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17. 요즘의 교회를 보면 중세의 신앙으로 회귀한 듯할 때가 많다. 신앙은 삶인데, 어느덧 신앙이 사명으로 뒤바뀌어 있는 듯하다. 삶은 없고 사명만 있다. 공덕을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려 했던 중세의 신앙인들처럼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은 사명을 성취하여 천국에 들어가려는 듯하다. 사명은 우리 시대의 공덕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공덕을 쌓기 위해 성물을 모으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행이 유행했다. 중세의 거지들은 본인들을 통해 사람들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거라며 자부심을 가졌고, 그래서 직업 거지들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공덕을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은 공덕을 쌓을 거리가 필요했기에 조작된 성물을 사들이거나 거지들을 일부러 방치해 두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삶은 없고 공덕만 존재하는 상황인 것이다.

 

18. 공덕에 사로잡히면 삶이 눈에 안 들어온다. 사명에 사로잡히면 삶이 눈에 안 들어온다. 사명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의 삶은 눈에 안 들어오고 그들의 죄나 그들이 나와 같지 아니한 것만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굴게 되기 십상이다. 모세가 바로 그랬다. 상대방의 삶이 들어온 게 아니라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들의 잘못에 개입하려다가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라며 저항을 받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모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면 자식의 삶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식이 잘못하고 있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부모는 자식을 훈육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모세처럼 자식을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대하게 된다.

 

19. 사명이 아니라 삶이 먼저다. 미디안 광야에서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신다. 신학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오셔서 살다 보니 십자가를 지게 되셨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논쟁이다) 우리는 신앙고백 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한다. 이 고백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신앙고백은 발생한 일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라기 보다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살다 보니 십자가를 지게 되신 것이다. 삶이 먼저이지 사명이 먼저가 아니라는 뜻이다.

 

20.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는 말은 사명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명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 사귀어 살다 보면 그 사랑 안에서 신비한 방식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나에게 임하는 삶의 한 형태이지, 삶과 사명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무슨 사명을 받은 거지, 나는 무슨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라고 하면서 사명을 받지 못한 삶인 것 같아서, 또는 사명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힘들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명은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사명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21. 삶은 없고 사명만 있는 자는 왕궁의 모세처럼 얼마 가지 못해 무너진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성찰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는 자는 어느 날 사명이 주어지면 그 사명을 잘 감당한다. 삶과 사명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 사명을 통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증명하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모두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주님의 품이 너무 좋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