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생로병사입니다. 삶이란 늙고 병들어 죽는 겁니다. 삶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 대한 묵상 없이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모른 채 합니다. 그것들을 삶과 분리시켜 놓는데 혈안입니다. 웰빙(Well-Being)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 웰다잉(Well-Dying)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옛날에는 늙은이와 병든이 그리고 죽은이가 한 구역 안에 또는 한 집안에 함께 살았습니다. 요즘처럼 요양시설과 의료시설이 없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차원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생로병사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잠언 31:16)이는 말이 있습니다. 장수가 복이었고 백발의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발의 노인은 존경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늙음이란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집니다. 늙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늙은이를 짐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늙어야 합니다. 그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병든이는 병원으로 또는 요양시설로 옮겨집니다. 물론 분주한 사회구조 속에서 병든이를 돌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병든이를 돌보는 일이 남의 일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병원은 치료의 기능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병원은 병을 우리의 일상에서 분리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병듦과 분리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병듦에 서툽니다. 병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서툴고 병을 다루는 방법에도 서툴고, 특별히 병든이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일에 서툽니다. 병든이를 위한 위로의 말이 겉돌 뿐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염도하고 매장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서 알고 삶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죽음은 전문가가 대신 처리해 줍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물 몇 방울만 찔끔 흘리기만 해도 어느새 내 앞에서 죽음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져 버립니다. 죽음에 대해서 묵상해 볼 겨를도 없이 일상으로 다시 내던져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로병사에서 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나머지 세 가지, ‘로병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삶은 반쪽 짜리 삶도 못 되는 사분의 일 쪽 짜리(Quarter Life) 삶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빈곤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대인의 빈곤한 삶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늙는 것, 병드는 것, 그리고 죽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기쁨을 충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은 늙고 병들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생로병사를 철저하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 마십시오. 그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고 당당 하십시오. 이 세상의 생로병사를 잠깐 지나 우리는 곧 영원한 생명, 부활의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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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