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4. 01:46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2:13-18)

 

우리는 성탄절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성탄절 때, 구유 안에 누우신 예수를 생각하며, 목자들의 찬양과,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도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처럼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스토리 전개를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우리는 대체로 이것을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따로 떼 내어 마치 없는 것처럼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동방박사들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유대땅을 떠나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잔인한 일들이 발생한다.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된다. 찬양과 경배의 아름다운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갑자기 학살이라는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말해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13).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행동지침도 알려준다.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13). 이 사건에 대하여 마태는 이것이 예언의 성취를 이룬 이야기라고 설명해 준다.

 

마태복음은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자 쓰인 성경이기 때문에 모세오경의 구조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며,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인물로 생각나게 한다. 이런 예언의 성취모티브는 다음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요셉이 주의 사자가 지시한 대로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유대 땅에는 슬픈 사건이 발생한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을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모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이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라”(16) 지시했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하여,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잃은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이 사건을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마태가 끄집어 낸 구약의 성경은 예레시야서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31:15).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질문 거리를 가지게 된다. 왜 라헬이 등장을 하며, ‘라마라는 지명은 무엇인가?

 

라헬(Rachel)은 야곱의 두 부인(레아와 라헬) 중 한 명이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12명의 아들 중, 마지막 11번째와 12번째 아들이 라헬에게서 난 아들이다. 라헬이 난 두 아들은 요셉(11번째)과 베냐민(12번째)이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는 이야기를 기록한 창세기 39장에 보면,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다. 그래서 그녀는 베들레헴에 묻힌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라헬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아기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아기 예수의 탄생 사건 때문에 발생한 유아학살사건도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래서 라헬은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라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남유다의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집결시켰던 곳이다. 라마는 슬픔이 시작된 곳으로서, 베들레헴의 이미지와 같다.

 

여기서 또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라헬의 통곡을 말하는 이유다. 라헬은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라헬의 소생 요셉의 아들)의 할머니이자, 남유다를 이루는 베냐민의 어머니이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이방인들)에 의해서 멸망할 때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남유다가 망해가는 것을 바라보며 한 없이 눈물을 흘렸던 선지자이다.

 

라헬의 통곡은 남유다보다 먼저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년에 멸망한 북이스라엘에 대한 기억이다. 자식을 갈망하던 라헬이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모습은 이방민족들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며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비극적인 슬픔을 극적으로 묘사해준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할 때 가졌던 가슴 아픈 기억이, 지금 남유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라헬이 통곡하며 위로 받기를 거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리얼이다. 내장이 뒤틀린다. 그래서 그것을 단장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방 민족에게 자식을 잃게 된 라헬은 통곡 소리만 낼 뿐, 어떠한 말로도 위로받지 못한다.

 

마태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끌어다가 예수의 탄생 사건과 함께 발생한 유아학살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라헬의 통곡을 언급하고 있는 예레미야서 31장의 말씀의 주제가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유대땅에는 유아학살사건이 발생하여 수많은 라헬이 통곡 중이다.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죽인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그는 에돔(이두메) 사람이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땅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그런, ‘이방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이들은 그 옛날,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같은 역사적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유아학살사건과 라헬의 통곡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떡하냐. 라헬의 통곡을 하고 있는 저 수많은 라헬은 누가 위로해 주지? 무슨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저 라헬은 어떻게 위로를 받게 될까?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저 가장 큰 슬픔을 지닌 수많은 라헬은 누가 어떻게 위로를 받지?” 이러한 깊은 질문에 마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사건에 휩싸인 베들레헴의 수많은 라헬은 가까스로 애굽으로 피난하여 곧 귀환하게 될, 예수에 의해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성탄절은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탄식의 시간이기도 하다. 장사 안 된다고, 탄식을 싫어하는 상업주의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게 하여, 성탄절 이야기가 마치 기쁨만 있고, 탄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탄식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순서적으로 기쁨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탄식이 오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그리스도)의 도래는 탄식때문이다. 사람들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탄식, 라헬과 같은 깊은 통곡, 그 무슨 말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위로해 주신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소망인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라헬의 통곡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우리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이유이다.

 

누군가는 성탄절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아학살사건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만 살고 다른 유아들은 죽게 내버려둔 그가 무슨 메시아냐? 메시아가 탄생했을 때 왜 갑자기 그 메시아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야 하나? 이 사건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군!”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면, 충분하게 가질 수 있는 의구심들이다. 나도 그랬다. 나도 의문을 던졌다. “왜 메시아가 탄생했는데,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야만 했지?”

 

그러나, 복음서를 끝까지 읽으면 그러한 의구심들이 풀린다. 우리는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자기만 살아난메시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슬픔과 고통을 몸에 지고 그들과 함께 죽는그리고, ‘그들에게 참 위로가 되기 위하여 죽는메시아를 만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한 신비이자, 위로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수많은 순교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순교를 잘못 생각한다. 우리는 순교를 예수를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순교란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에 대한 가장 숭고한 선포이다. 예수를 위해 죽지 말라. 우리가 죽어서 예수를 영화롭게 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순교하는 이유는 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순교하는 이유는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는 라헬의 통곡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 그래서 순교는 값진 것이다.


(아래 세바스티아의 40명의 순교자들 이야기는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옴) 

"겨울이면 생각나는 세바스티아의 40명의 순교자들이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박해종식 칙서에 공동서명한 리키니우스(Licinius) 동로마 황제는 316년 태도를 돌변하여 카파도키아 지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명령한다. 교부 바질(Bishop Basil of Caesarea (370–379))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세바스티아[지금 터기의 Sivas]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 아그리콜라우스는 40명의 기독교인 군인들을 벌거벗겨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을 깨고 집어넣는 고문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한다. 그리고 호수 곁에는 장작불을 지펴 놓고 이교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 옆에는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를 놓아두고 배교를 유혹했다.

 

그러나 40인의 군인들은 한 목소리로 밤새 노래를 부르며 버텼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40인의 선한 군인, 40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40 good martyrs, 40 good soldiers for Christ.” 이들은 3일간이나 지독한 추위를 견뎌내며 기도와 노래를 했는데 그만 그 중 한 명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이교 신에게 절하고 따뜻한 욕조에 뛰어들었으나 심장마비로 즉사하고 만다. 동료의 배교로 슬픔에 잠긴 군인들은 다시 힘을 내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39명의 선한 군인, 39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이 때 이교도 교도관 군인이 잠시 졸다가 꿈을 꿨는데 하늘에서 천사장이 내려와 순교를 작정한 이들의 머리 위에 면류관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닌가. 이에 감동한 교도관 군인이 배교한 병사의 자리를 대신 자기가 채워 면류관을 받기 위해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도기독교인이 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순교를 다짐한 대열에 참가한다. 군인들은 다시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40인의 선한 군인, 40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그 다음 날 아침 총독은 아직도 숨이 남아 있는 40명을 끄집어 내어 화형에 처한다. 그러나 이들의 장엄한 순교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중지되는데, 바로 2년 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를 마지막 회전에서 격파시키며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고, 기독교에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UCAL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에서 가져옴 / 이것은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기독교 역사의 일화이기에 그대로 옮겨 적는다.)

 

건장한 청년들이 전장에 나가서 적군에 죽은 것도 아니고, 그들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죽었다는 전사또는 순교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 건장한 청년들의 어머니는 어떠한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이들도 라헬처럼 통곡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위로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순교는 예수를 위한 죽음아니라,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복음의 선포였기 때문이다.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한 기도를 드리자. 그 어떤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라헬의 통곡에 휩싸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나 자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사정, ‘라헬의 통곡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에게도, 우리의 형제자매에게도,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라헬의 통곡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위로 받기를 거부하는 그 라헬의 통곡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를 해서라도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를 전하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순교자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전한다면, 머지않은 날, 세상의 모든 라헬은 위로를 받고,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하고 기대하라  (0) 2020.01.06
흔들리며 성장하는 믿음  (0) 2020.01.04
Dangerous Memory (위험한 기억)  (1) 2019.12.24
말씀과 기도는 왜 중요한가  (0) 2019.12.16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0) 2019.12.10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