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2. 18. 08:16

[시론] 허수경의 시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자연의 천사

나뭇잎이 떨어진다

눈썹 없이 의지 없이 기억 없이


(허수경의 시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이 아니라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슬픔을 가득 안 고 있는 문장을 만나면, 그 문장은 꽃보다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어느 가을의 코스모스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심지어 라일락도 아픔을 안고 있는 문장에 비하면 초라해질 뿐이다.

 

"잘 있니?" 시인은 안부를 묻는다.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안부를 묻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시에는 그러한 심상이 외부적으로 거의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아픈 역사, 홀로코스트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만 꼽자면, '나치 할아버지'라는 단어만이 어렴풋이 그 심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은 인류의 어느 한 부류만이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라는 모든 부류의 사람이 경험한 사건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폐기되던 전생과 이생의 우리." 그곳에서 '우리'는 이생 뿐 아니라 전생의 삶까지도 모두 짓밟혔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미래의 오염된 희망"이다. 전생과 이생이 모두 폐기됐는데, '우리'에게는 어떠한 미래의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잘 있을 수 없는 존재에게 시인은 계속 묻는다. "잘 있니?" '근본 악'(이것은 아렌트의 용어이다)에 의해 존재가 상실되던 날, '우리'는 아주 신비한 소리를 들었다.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이들을 고요하게 매장했던 바다의 안개 소리도 들었네". 그런데, 그 소리는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명확하지 않다. 시인은 다르게 상상해본다. "아니, 돌고래가 새벽의 태양을 바라보며 출산과 죽음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니?"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 존재를 인정 받지 못한다는 것은 존재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인식 받지 못하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아무런 죄책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한 행위는 '근본악'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에게 안부를 물어야 한다. 인정 받는 존재만이 아니라 인정 받지 못하는 존재에게도 안부를 물어야 한다. 적어도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인식 받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적극적'으로 안부를 묻는다.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분명 존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근본악'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존재를 인식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시인 같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자연의 천사'.

 

이렇게 아픈 낙엽이 있을까. "눈썹 없이 의지 없이 기억 없이" 떨어지는 낙엽 말이다. 그렇게 아프게 떨어지는 낙엽을 손으로 받아내며, 안부를 물어본다. "잘 있니?" 그러면 낙엽은 분명 눈썹에 힘을 주고 의지를 가지고 기억해 낼 것이다. 자기의 존재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