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2. 28. 08:36

[시론] 허수경의 시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등등의 고백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허수경의 시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심리상담사의 꼬임, 혹은 인턴이 건네주던 하얀 줄이 박힌 푸른 사탕 때문에,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해 버린 시인은 후회한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는 시인의 행동에서 그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지금 이미 마음이 유랑하고 있다. 어디로든 가고 싶은데,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우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심리상담사는 시인에게 조언을 해준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해요.” 같은 조언이다. 누가 모르나? 그런데 잠이 안 오는 것을 어떻게 하나. 잠 드는 것이 힘들고, 잠이라도 들면 꿈 속에서 심리상담사를 죽이는 꿈을 꾸는데, 시인이 어떻게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시인을 보고,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하다는 상담을 해주는 심리상담사가 밉다.

 

시인은 심리상담사와 상담을 하면서, 점점 자신의 내면세계를 열어 보여준다. 그 안에는 편지가 가득하다. “죽은 허씨에쓴 편지, “얼어 죽은 국회에게쓴 편지, “맞아 죽은 은행에게쓴 편지, “우주로 납치된 악몽에게쓴 편지, “달에 있는 나의 거대한 저택에게쓴 편지,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실체를 고백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에요.”

 

시인은 이 고백을 후회한다. 자신이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라는 고백 뒤에, 시인은 계속하여 고백을 쏟아 놓는다.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고백하지 말았어야 할 고백들은 시인은 하고 말았다. 그래서 시인은 후회한다. 시인은 이 고백을 강제된 고백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고백이란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나의 무엇을드러내는 놓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은 좋은 것일수도 있고, 나쁜 것일수도 있다. 가령 사랑의 고백 같은 경우는 좋은 것이다. 반대로, 죄의 고백 같은 경우는 나쁜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때로, 사랑의 고백은 드러내 놓지 않는 게 좋을 때가 있고, 죄의 경우는 드러내 놓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사랑이 때론 죄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쓴 [재고록(Retractationes)]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고백록(Confessions) 13권은 나의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을 말함으로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을 자극하여 하나님에게 향하게 하고 있다”(재고록 II, 32).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sions)>을 보면, 기독교인의 고백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번역한 선한용 교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왜 고백록을 썼는지 이렇게 밝히고 있다. 1) 자기 자신이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ad Deum) 마음을 향하게 하여 그를 사랑하고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2) 교회를 돌보고 양떼를 양육하는 감독으로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는가?’에 대하여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할 책임 때문에, 3) 교인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4) 교회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설명해 줄 필요를 느껴서, 5) 고백록을 듣거나 읽게 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깊은 곳을 알게 하기 위하여, 6)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해와 비판에 대하여 정당하게 답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모두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이유를 따를 필요는 없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언제나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고백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향하게 하고 그를 더욱더 사랑하고 찬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심리상담사에게 고백한 이유는 자신의 삶을 사랑해서다. 살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데,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고백하는 거다. 이처럼 고백은 생명에의 갈망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인간의 탄식이다.

 

우리는 나의 생명에 대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고백을 가지고 사는가. 남들이 들으면 얼토당토한 고백이라 할지라도, 고백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어떤 고백이 우리 안에 있는가. 고백하면 후회할지 모르지만, 고백 없이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향하여 진심으로고백하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