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1. 2. 04:07

[시론] – 허수경의 시 포도메기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구워서 먹이면 약효가 있다."

(허수경의 시 '포도메기'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 수록)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읽고 허수경이 쓴 시 '포도메기'의 마지막 구절이다. <자산어보>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허수경의 시를 통해 본 <자산어보>는 참 따뜻한 책인 것 같다. <자산어보> 1801년 신유박해 (천주교 박해사건) 때 정약전이 전라도 흑산도로 귀양을 가 살면서 그곳의 해상 생물을 관찰하여 쓴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귀양살이가 고달팠을 텐데, 그 고달픈 귀양살이를 고달프게 보내지 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정약전 뿐 아니라 그의 동생 다산 정약용도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큰 학문적 업적을 이뤘다. 그들이 귀양살이를 하게 된 원인이 종교탄압이었으니, 어쩌면 그들의 의미 있는 삶은 그들의 신앙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해석이다.


기독교 역사에도 귀양살이 가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이다. 그는 아리우스와의 논쟁으로 유명한데, 그 당시에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장이 아타나시우스의 주장보다 우세했다. 이에 대해 성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까지 탄식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 세상을 아리우스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상을 뒤엎은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이다. 그는 아리우스의 삼위일체론에 맞서 투쟁의 삶을 살게 된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아타나시우스는 그로 인해 여섯 번이나 추방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정략적 대응을 하지 않고 추방당한 곳에서 묵묵히 몸과 마음을 수련했다. 그때 탄생한 책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이다. 그는 추방을 오히려 자기 수도의 기회로 삼고 추방의 아픔으로 인해 심성이 피폐해지기는커녕, 묵묵한 영성으로 아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뒤엎고 현재 우리가 기독교의 정통으로 여기는 삼위일체론을 정립했다.


글에는 한 사람의 삶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그 경험이 고통스러웠다면 글에는 고통이 담기고, 고독했다면 고독이 담기고, 아름다웠다면 아름다움이 담긴다. 글은 손재주가 아니라 영혼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일상을 살면서도 귀양살이 사는 것처럼 살지만, 어떤 이는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산다. 어떠한 삶을 살든, 그 삶에서 의미를 발견한 사람의 말과 글에는 생명을 보듬어 주는 따스함이 묻어난다.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구워서 먹이면 약효가 있다."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문장 같으나, 나는 여기에서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경외를 느낀다. 평소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면, 그 아이에게 약효가 있는 바다 생물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은 그 생명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 줄 수 있는 방도를 신비롭게도 찾아낸다. 이런 점에서 '약효'는 물리적 특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듬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믿고 싶다.


나의 말과 글, 그리고 나의 미소는 삶에 지친 이에게 어떤 '약효'가 있을까? 따뜻한 문장 한 줄 덕분에,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삶에 지친 이들의 생명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줄 방도가 신비롭게 다가올 것 같은 희망도 솟아났다. 마침, 아침 메뉴로 '조기'를 구워 먹어서 인지, 오늘은 '침을 흘리지 않을 것' 같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