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3. 24. 09:49

시편 18

은혜와 공적

 

일방적으로 맺어지는 관계는 없다. 그건 노예 계약일 뿐이다. 짝사랑이 아름답긴 해도, 그건 사랑의 허상이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상상만이 투영되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다. 인격적인 관계는 쌍방향의 개념이다. 서로 마음을 나눌 때 참 사랑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찬양은 일방적이지 않다.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또한 일방적이지 않다.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격적인 돌봄을 받는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고백하는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자가 베푸는 은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보호의 역할을 한다. 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이렇게 표현된다. ,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의 뿔, 그리고 산성.

 

시인은 왜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을까? 시인은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21-24).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시인은 의인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은 구약의 개념이다. 이런 신앙은 율법에 얽매이게 된다. 율법이 곧 하나님이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자기 의덕분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와 공적을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다르다. 구원은 배타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뜻이다. 자기 의는 공적이다. 이것으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를 범하는 거다. 자기 의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은혜(칭의)로 구원 받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의롭게 살아야 하는가? 의로움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거라면 무엇 때문에 의로움을 추구하는가?

 

다시 한 번 관계와 구원의 문제를 돌아보자.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사귐)는 일방적이고 배타적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노예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의로움이다. 의로운 자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사귐은 쌍방향이다. 이 사귐에 들어온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신다. 그것이 곧 구원이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겉으로는 자기의 의를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자기 의를 말하면서 구원을 확신하는 이유는 자기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의()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의는 공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생겨난 의는 은혜이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 시인은 그것을 찬양하고 있다. 얼마나 분명하고 감사한 찬양의 이유인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