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만장일치가 줄어 들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선행에 있어서의 관대함이 감소하는 것과 비례하여 만장일치(unanimity/consensus)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들은 자기 소유의 집과 농장들을 팔곤하였다. 스스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비용을 사도들에게 제공하곤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인색해서 십일조를 내는 것조차도 하지 않으며, 그리고 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팔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동산을 매입해서 늘리기를 좋아한다.

 

우리에게 신앙의 활기는 시들어짐에 따라서 믿음의 능력은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시대를 살펴보면서, 주님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 올 때에 참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그의 예견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있어서, 의의 법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선행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도 다가올 두려운 일들에 대해서 묵상하지 않으며, 아무도 주님의 날과 하나님의 진노, 불신자들에게 쌓이는 심판, 배교자들에게 지정된 영원한 고통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믿는다면, 우리 양심은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그러나 우리 양심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믿는다면, 주의할 것이고, 만일 주의한다면,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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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누구의 글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이것은 요즘 시대의 어느 '선지자'가 이 시대를 개탄하며 쓴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3세기에 살았던,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의 글이다. 그는 주후 250년경 노바티안(Novatian)으로 인하여 벌어진 교회의 분열 사건 때문에 쓴 '교회의 일치(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에 대한 글 말미에서 위와 같이 그 당시 교회의 사태를 진술한다.

 

키프리아누스의 이러한 서술은 위안인가 절망인가. 위안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 교회의 행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고, 절망의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의 행태의 이러한 역사는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절망이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나 하는 것일까. 요즘 "스스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선행하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십일조 내는 것도 인색해진 초라한 믿음과 부동산(재산)을 늘리기에 급급한 욕망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치 '하늘'이 없는 것처럼 산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활기는 점점 시들어가서 더 이상 시들 것이 없는 것처럼 말라 비틀어졌고, 믿음의 능력은 점점 희미해져서 더 이상 능력이 없는 것처럼 무능하기 짝이 없다.

 

키프리아누스는 묻는다. 우리는 사도적 전승을 잘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며 그분의 법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말한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He can no longer have God for his Father, who has not the Church for his mother)."

 

어머니(교회)를 모르니, 아버지(하나님)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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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