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26. 21:12

신앙의 역설

(고린도후서 8:1-5, 16-19, 9:7, 11)

 

1. 고린도후서 9장에는 ‘연보(捐補)’라는 말이 나온다. 한자어이다 보니 마음에 착 와 닿지 않는다. ‘연’은 ‘버릴 연’이고, ‘보’는 ‘도울 보’이다. ‘연보’의 뜻은 “자기 것을 버려서 해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헌금(Offering/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다르다. 그래서 영어로 ‘연보’를 옮길 때 ‘offering’이라 하지 않고, ‘liberality/generosity’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연보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고린도후서의 컨텍스트 안에서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관대한 마음으로 내는 물질(재산)을 말한다.

 

2. 바울이 ‘연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고린도 교회와 바울 일행 간에 오해가 생겨서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은 ‘눈물의 편지(frank speech)’를 써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돌려 놓았다. ‘솔까말 편지’를 보내 놓고 마음 조렸던 바울은 디도 편에 온 고린도 교회의 회개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기뻐했다. 바울은 뜬금없이 ‘연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9장 5절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노니.”

 

3.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미루어 보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 일행에게 ‘연보’를 약속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 일행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오해(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뭔가 잘못한 일 / 복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안에서 벗어난 일)가 발생하여 둘 사이가 별로 좋지 않게 되었다. 화평(peace)이 없으면 무슨 일이든 진행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고, 주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공동체(부부 간/친구 간/동료 간)에 화평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서로 간에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다.

 

4. 고린도 교회와 다시 화평을 이룬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고 있다. “예전에 약속했던 연보를 관대한 마음으로 실행하라!”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는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렇게 마음 먹었다가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일을 다시 실행하는 일은 처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들게 마련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연보를 독려하면서 다시 한 번 ‘칼 와호메르 논리(하물려 논리)’를 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이야기를 꺼낸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연보를 했습니다”(우리말 성경).

 

5. 마게도냐 지역은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는 곳이다.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고린도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핍박도 많았고, 극한 가난 속에서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아주 관대한 마음으로 연보를 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도 자발적 관대함을 보여주었는데, 하물며(칼 와호메르 논리), 풍성함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더 큰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6.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교회/데살로니가 교회)은 어려운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관대한 연보’를 할 수 있었을까?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면, 마음이 좁아지는 법이다. 자기가 힘들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십상이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 교회의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게도냐가 교회들이 관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족하기 自足, self-sufficiency’를 배웠기 때문이다. 자족이란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 뭔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한 기독교 영성이다.

 

7.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음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왜 가진 게 이렇게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예쁘지 않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하지 않지? 나는 왜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지? 나는 왜 친구가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외롭지?’ 등등, 전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군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이런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라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립보서 4:11-14).

 

8. 너무도 아름다운 말씀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칭찬하는 장면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처럼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천했다는 뜻이다. ‘나 왜 이렇게 힘들지’, 하면서 신세 한탄하고 외로워 하고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천한 빌립보 교회는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를 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9.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이 관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착한 일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미 나는 주 안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풍성하기 때문에 그 풍성함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의 공급자이시고 우리들은 그 은혜를 받는 수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은혜를 공급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가난한 자/육신이 가난한 자 또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공급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신앙의 역설이다. 한 마디로 이거 아니겠는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렇게 외치는 것!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

 

10. 성경에는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를 외치며, 신앙의 역설을 보여준 신앙의 선조들이 즐비하다. 사무엘하 15, 16장에 보면, 다윗이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예루살렘 궁을 빠져나와 피난 길에 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가. 식솔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바후림이라는 곳을 지날 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나타나서 피난 길에 오른 다윗을 저주한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 16:7-8).

 

11. 그때 시므이의 저주를 들은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다윗 왕에게 “시므이의 목을 칠까요?”라고 물어본다. 다윗 왕은 화난 장수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0-12).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람의 관대함은 이렇게 어려울 때 드러나는 법이다.

 

12.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를 외치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관대한 마음을 보이는 이야기를 우리는 열왕기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이다. 그때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도 그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극심한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께서는 많고도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사는 한 과부의 집으로 보내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곳에 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이렇게 청한다. “물 한 모금 주시오. 그리고 떡 한 조각 좀 주시오.” 극심한 가뭄에 물과 떡이 어디 있겠는가.

 

13. 엘리야의 청을 들은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이 보다 비참하고 슬픈 장면이 어디 있는가. 극심한 가뭄 때문에 먹을 게 없어서, 이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자식과 함께 죽으려고 작정한 엄마의 최후.

 

14. 신앙의 역설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게 최후의 죽음을 작정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4). 극심한 배고픔, 극심한 비참함 가운데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그 순간 신앙을 택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르밧 과부의 관대함이 엘리야 선지자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본인과 자식도 살렸다. 육신의 선택이 아닌 신앙의 선택은 늘 이렇게 우리가 예상치 못한 구원을 가져오는 법이다. 할렐루야!

 

15.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는 부요한 교회였다.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들도 자족하기를 배우고 자발적 관대함을 보여주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듯이, 하물며, 풍성함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더 큰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풍요로운 고린도 교회도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자족하기를 배워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16. 바울은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에 다시 한 번 디도를 보낸다. 바울에게 있어 디도는 어렵고 힘들 때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었다.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들고 가서 오해와 음해 가운데 빠져서 삐딱하게 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잘못을 돌이킨 장본인이었다. 이제 바울은 디도에게 극심한 어려운 가운데 빠져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연보를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아서 오는 중요한 일을 맡긴다. 이렇게 신실한 주의 일꾼이 있다는 것은 교회의 희망이다. 우리 모두 디도처럼 신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면 좋겠다.

 

17. 어려울 때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요,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상황이 더 좋은 사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은혜요 믿음이다. 신앙/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신실함은 어려울 때 움츠러들지 않고 역설적인 관대함을 나타낸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우리 모두,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관대한 마음으로 선한 일 하기를 멈추지 말자. 마게도냐의 교회들처럼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더욱더 관대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역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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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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