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26. 13:34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

(사도행전 4:5-12)

 

부활의 영(성령)이 임한 제자들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사도행전에 기술되고 있는 ‘역사/work’들은 그 당시의 유일회적인 역사(work)가 아니다. 성전 미문(Beautiful)에 있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가 일으켜진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장애가 치유되는 사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구원 사건이다(죽은 자 가운데서 주님이 일으켜지신 것처럼, 이 사람도 일으켜진다). ‘일어남’을 통해서 그는 두 발로 걷고 뛰고 한 것을 넘어서, 그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생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치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애가 치유되고, 병이 낫는 등의 소위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느냐 모르게 되느냐’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시간(역사)을 뚫고 들어온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 부른다. 감동적이어서,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해서 은혜가 아니라, 우리 피조물들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에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압도적으로 임한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전 미문 사건 때문에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공의회 앞에 서 심문을 받게 된다. 사도들이 자기들(공의회)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역사(work)’를 행했기 때문이다. 공의회 앞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이 받았던 질문을 똑같이 받는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들의 권세가 지금 위협당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가 권세를 위협받으면, 거칠어지는 법이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복음의 내용 –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9-10절). 이것은 정말 대단한 대답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자기들도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까봐 도망쳤던 사도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똑 같은 사람인데, 부활의 영을 받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같은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다른 세계에 가는 것이다. 같은 세계에 살면서 달라질 수는 없다. 사도들은 이제 부활의 영 안에서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 나라(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자신들이 살던 세계에서의 말과 행동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새롭게 살게 된 하나님 나라의 말과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살면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고 행할 수는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부활의 현실, 즉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기에, 사도들은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부활의 현실을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를 고쳐준 것이고, 공의회 앞에서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였던 것이다.

 

심리학에서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이라는 게 있다. 대상은 영어로 'object'라 한다. 이것을 분석하면, '내 앞에 ob' + '던져진 ject'이다. 즉, 대상이란 ‘내 앞에 던져진 현실 또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대상관계이론'이란 내 앞에 던져진 대상적 현실(존재)과의 부단한 소통을 말한다. 이 대상관계이론은 주로 아동심리학에서 아이들과 특별히 엄마 간의 내적/심리적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사용이 되는데, 아기에게 '대상(내 앞에 던져진 존재)'은 엄마이다. 그래서 아기는 대상적 존재인 엄마와 끈임없이 소통을 하며 성장한다. 내 앞에 던져진 존재, 또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떠한 소통을 해 오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성장은 달라진다. 

 

2019년도에 만들어진 공상과학 영화 <I Am Mother>가 있다. 미래의 이야기이다. 미래에는 여자의 자궁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엄마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기계에서 아기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역할을 해주는 사이보그(로봇)을 만나게 되고 그것의 돌봄에 의해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세상이 정말로 오게 될지 모르겠다. 여러가지 정황상, 아마도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은 이것이 주제가 아니니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자.)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그런 세상이 도래하기 전, 어쨌든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가장 먼저 ‘대상’으로 만나게 된다. 아기는 태어나서 세상이라는 대상에 던져지게 되고, 엄마라고 하는 대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다른 말로 이것은 아기에게 ‘엄마’라고 하는 존재가 곧 아기의 온 세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성장하면서 엄마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대상을 계속하여 만나게 되고, 그래서 대상의 확장이 이루어지겠지만, 어쨌든, 아기는 태어나서 확장된 세상을 만나기 전, ‘엄마’라는 세상을 만날 수밖에 없다. (남성중심세상 X, 자본중심세상 X, 엄마중심세상 O / 엄마 같은 교회)

 

그래서 심리학의 대상관계이론은 한 사람이 아기 때에 엄마와 어떠한 내면적인/심리적인/심층적인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체성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심리치료를 위해서 아기 때의 온 세상이었던 엄마와의 대상관계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심리학에서는 아기 때의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어땠느냐가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상관계이론에서 설정한 이러한 문제의식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아기 때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아주 좋았어도 성인이 되어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고, 아기 때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아주 좋지 않았어도 성인이 되어서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대상으로 누구를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

 

우리는 대상관계이론이 주는 통찰력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은 평생에 걸쳐, ‘내 앞에 던져진 현실(또는 존재)’과의 부단한 소통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대상관계이론의 통찰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보면, 우리 앞에는 불가항력적인(은혜로) ‘내 앞에 던져진 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다. 그것과 어떠한 소통을 이어 가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들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을 부인하는 공의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미워하며 살 뿐이다. 그러나, 자신들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사도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았다. 그것은 부활의 세계, 하나님 나라, 구원의 삶이었다. (단순히 보여주는 게 아니라 초대하는 것. 너희도 이렇게 살라!)

 

우리는 부활의 현실과 어떤 대상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 성경은 우리 앞에 부활의 현실을 내 던지고 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내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과 우리는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우리는 결단에 놓여 있다. 부활의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구원의 현실과의 부단한 소통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된 사람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시는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요한 행은 ‘처럼’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이라고, 한 문장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처럼’만 따로 떼어내, 그것으로 한 행을 이룬다. ‘처럼’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김응교 교수의 시해석을 한 번 들여다보자.

 

사실 ‘처럼’만 이렇게 한 행으로써 있는 시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 시가 아니더라도 영어 시, 일어 시, 중국어 시에서 ‘처럼’만 한 행으로 된 시를 본 적이 있나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윤동주는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길이 ‘행복한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은 ‘행복한’ 하나의 주체가 됩니다. 그러나 ‘처럼’이라는 직유법처럼 그 길은 도달하기 힘든 삶이지요.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삶, 윤동주는 그 길을 선택합니다. (김응교의 저서 <처럼>에서)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종교시로 읽는 사람은 없다. 윤동주를 종교 시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윤동주의 시와 삶에서 사람들은 ‘숭고미’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에 의해서 압도당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대상으로서의 윤동주는 사람들에게 숭고함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그의 시에 특정 종교의 용어인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등의 단어가 들어갔어도 그것을 특정 용어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편 용어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윤동주의 숭고미에 압도되어, 그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부활의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미 안에서 그분 ‘처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욕망이 분출되는 것, 그래서 이제 이 세계를 떠나 부활의 세계, 하나님 나라를 살겠다는 결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믿는다. 그러한 삶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던져지는 대상으로서, 그 존재 앞에 던져지는 부활의 현실로서, 그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는,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하는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윤동주의 시에서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본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사도들에게서 동일하게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대상(object/그 존재 앞에 던져진 존재(현실))'이다. 대상으로서의 존재인 '내'가 대상으로서의 존재인 '너'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인간의 과제이다. 우리가 대상으로서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현실은 무엇이겠는가. 부활의 현실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미문에 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부활의 현실을 준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내’가 대상으로서의 ‘너’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는,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하는 삶. 그것이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고 아무리 작은 구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겨자씨와 같아서 그 구원을 받은 이가 나중에 어떠한 존재로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활의 현실을 경험한 우리가 할 일, 이제 이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는 우리들이 할 일은 사도들처럼, 윤동주처럼,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생각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고,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부활의 현실을 사는 것이다.

 

부활의 현실이 가져다주는 구원을 생각해 볼 때, 기독교 문화 위에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총기사건과 폭력사건과 혐오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이 부활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살았다면,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고,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할텐데, 오히려, 구원이 아닌 죽음이 난무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 어느때보다도 부활의 현실이 강한 바람같이, 불의 혀같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또한 지구의 날을 지키며 예배 드리는 이 날, 우리 인간은 지구 자연에게 어떠한 대상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위기와 그로인한 일련의 자연재해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부활의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자연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서든 죽음을 가져다주려 하는 나쁜 존재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를 건너는 힘은 부활의 현실을 모른척하지 않고 정직하게 맞닥뜨리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부활의 현실’이 던져져 있다. 부활의 현실을 받아들여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 생명을 어떻게서든 이웃들에게 가져다주려 하고,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 생명을 어떻게서든 자연에게 가져다주려는 “십자가와 처럼”의 신앙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니, 진실하게 부활의 현실을 살고, 부지런히 부활의 현실을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자.

 

대상인 내가, 대상인 너에게 아름답기를!

대상인 네가, 대상인 나에게 아름답기를!

그렇게 아름다운 대상들이 서로 소통하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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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