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이야기2019. 11. 5. 03:33

쏘나타(Sonata)

 

우리 차 이름이 뭔지 알아? 등굣길, 아들에게 물어본다. 몰라(고개만 가로저었다. 전형적인 중학생의 반응). 쏘나타(Sonata/영어 발음으로 스나라’). 현대 쏘나타. 아들의 무반응(거의 , 어쩌라고의 수준).

 

나는 쏘나타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이렇게 아침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게 기쁘다. 왠지 알어?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이렇게 데려다 주셨거든(물론, 가끔 내가 힘들어할 때였다. 우리 때는 그냥 버스타고, 걸어서 학교 다녔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데려다 주실 때, 그때도 쏘나타였어. 그래서 아버지는 이렇게 쏘나타로 너를 데려다 줄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나서 행복하다. 아들에게 물었다. 아버지 말 이해하지?(Do you understand my story? Right?). 또 고개만 끄덕였다.

 

한국인의 국민차, 쏘나타는 1985년부터 생산된, 한국 자동차 브랜드로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소중한 추억인 담긴, 나의 최애(favorite) 자동차이다. 나의 아버지는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 쏘나타를 타셨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면서 타신 처음이자 마지막 승용차였다. 아버지는 평생 교회 봉고차를 타고 다니셨다(그때는 거의 모든 목회자가 그랬다.).

 

내가 세화교회에 부임했을 때(2017430), 교회에서 감사하게도 차를 사주셨다. 교회 리더들이 물었다. 어떤 차를 사드릴까요? 나는 쏘나타를 사달라고 했다. 이유는 너무도 명확했다. “저는 쏘나타를 타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목회를 더 열심히 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다. 쏘나타를 타면서 나는 매일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거짓없이 진실하게목회할 것을 다짐한다. 그게 바로 내가 아버지를 추억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나의 이런 마음을 기뻐하고 계실 것이다.

 

1990, 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은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골목마다 전경들이 쫙 깔려서 조그마한 범죄조차 저지를 겨를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집에 있는 물건 중 나의 호기심을 가장 끈 것은, 단연 쏘나타였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쏘나타 안에 머물며 운전하는 것을 시뮬레이션 했다. 그러다 아버지 몰라 쏘나타를 끌고 나가 동네 골목길을 돌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맘 먹고, 아버지 몰라 쏘나타를 끌고 나와 친구들을 태우고 학교에 갔다. 양재동, 언남고등학교, 우리 학교가 바로 눈 앞에 들어왔다. 도로 하나만 지나면 학교에 도착할 찰나, 우리는 전경의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세 명의 전경이 다가왔다. 창문을 내렸다. 면허증을 보여 달라는 전경의 말에 침이 꼴딱 넘어갔다. 전경들은 우리가 고등학생인 것을 알아채고, 우리 모두를 차 밖으로 불러냈다. 전경들은 우리보다 서너 살 많은 형들이었다. 우리는 싹싹 빌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했다. 그래도 두 명의 후임 전경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려 했으나, 선임 전경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10분을 빌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선임 전경이 서초경찰서에 무전을 쳤다. 순찰차가 모두 바빠 지금 바로 올 수 없다는 회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택시를 잡더니, 운전자인 나를 태워 양재 파출소로 이송해 갔다. 나는 꼼짝 없이 범죄자가 될 신세였다.

 

후일담이지만, 후임 전경 두 명과 남은 나의 친구들은 후임 전경들의 선임 전경에 대한 뒷담화를 말해주었다. 선임 전경이 특박에 눈이 멀어서 저렇게 독이 올라 택시까지 잡아 타고 나를 이송해 간 것이라 했다.

 

양재 파출소에 도착하자 마자, 파출소장님을 비롯하여 그곳에 근무하는 경찰 아저씨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면허 운전을 해?”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때, 파출 소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받아봣!” ㅇㅇ 경찰서에 정보과장으로 계시던 삼촌의 목소리였다. “준식아, 괜찮냐? 삼촌이 잘 말씀드렸으니까, 파출소장님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 이런 구세주가 있나. 나는 그때 나를 이곳으로 이송해 온 선임 전경의 눈을 쳐다보았다. 거의 똥 씹은 표정이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하며 파출소를 떠나려 했다. 그때, 아버지가 친구의 아버지(우리 교회 장로님)와 파출소로 들어오셨다. 아버지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파출소장님께 죄송하다며, 나 대신 사과하셨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원래 모범생이었다. 사춘기를 보내며 부모님 속을 썩인 일이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은 내 학창시절 내가 친 최고의 사고였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아찔한 사고이기도 하고, 이렇게 꺼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쏘나타에 얽힌 학창시절의 영웅담 같은추억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러한 일이 중대한 범죄로 분류되지만, 우리 때는 낭만이었다.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물론, 내가 잘 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정말 철없는 시절의 무모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운전면허증부터 취득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음 놓고 쏘나타를 몰고 다녔다. 재수학원(노량진 한샘학원)의 특강이 있는 날(주로 주일 아침에 했다.)도 쏘나타를 몰고 다녀왔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가끔 쏘나타를 몰고 학교에 갔다. 주차를 잘못한 바람에 견인된 적도 있다. 그때도 아버지는 나를 구하러 달려오셨다.

 

쏘나타와 얽힌 또 하나의 추억은 대학 들어가서 죽마고우와 설악산에서부터 경주까지 동해안 여행을 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아름다운 여행이 기억에 생생하다. 설악산에서 만난 교포와 경주에서 또 만난 덕에 그 친구가 묶는 경주의 힐튼 호텔 방에서 함께 라면 끓여 먹던 일도 기억나고, 결국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경주까지 가서 불국사를 구경하지 못했던 아쉬운 추억도 있다. 불국사 매표소 앞에서 경비 아저씨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입장 허락을 받지 못해, 우리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를 추억하며,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경주 불국사이다.

 

쏘나타는 나에게 그냥 차가 아니라, 추억이다. 그냥 추억이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쏘나타를 타며, 교회에 감사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목회를 열심히 할 것을 매일 다짐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추억을 이어가도록 쏘나타를 34년 동안 출시해준 현대자동차에 감사한 마음이다. 쏘나타 안에서 베토벤 피아노 쏘나타를 들으면, 쏘나타에 얽힌 추억이 샘솟는 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쏘나타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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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