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3. 19:56

약한 그리스도인 (Weak Christians)

(고린도후서 12:9-10)

 

1. 고린도후서 10장부터 마지막 13장까지는 한 호흡으로 가려고 한다. 마지막 네 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용어는 ‘약함(weakness)’이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과 10절은 그 약함에 대해서 가장 극명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운율을 붙여서 찬양으로 부르기도 한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복음의 맥락에서 ‘약하다는 것’, ‘약함(weakness)’이란 무엇일까? 살아남기 위해서 강한 자가 되라고 주문하는 우리 시대에 ‘약함’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을 받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특별히, 2세대 종교개혁자인 칼뱅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어야 한다’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고 싶다. 조명이란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다. 어두우면 잘 안 보인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는 빛을 비추어야 그곳을 잘 볼 수 있다. 언어는 때로 굉장히 어둡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인간은 언어에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문자는 매우 건조하다. 나는 그 건조한 문자에 성령의 조명을 비춘다는 것을 그 문자/언어에 담긴 ‘감정선(emotion line)’을 밝히 보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감정선(지금 어떤 감정(emotion)이 여기에 흐르고 있는지)을 복원해야 한다.

 

3. 고린도후서 10장 이후의 말씀에는 바울의 아주 세밀한 감정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곳에 흐르고 있는 바울의 세밀한 감정을 복원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바울의 감정선에 감정이입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부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흐르는 바울의 감정선은 ‘약함(weakness)’라는 용어에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4.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떨 때 약해지며, 약해졌을 때 어떤 감정이 드는가? 병 들었을 때도 약해지고, 속상한 일을 겪을 때도 약해지고, 무엇인가 간절히 바랄 때도 약해지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도 약해진다. 또한 누군가에게 부당한 공격을 받았을 때도 약해진다. 우리는 약해져 있을 때, 서러운 마음도 들고, 서글픈 마음도 들고, 억울한 마음도 들고,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이런 감정들은 모두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약해져 있을 때, 우리는 감정노동을 아주 심하게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주 지치게 된다.

 

5. 그런데, 본문을 보면, 바울의 약함은 이러한 약함과 조금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약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따라가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느 순간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아주 괴상한 말을 만들어 내어 바울을 공격했다. 10장 이후에는 그 공격이 무엇이었는지, 세 가지가 명시적으로 나온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글은 잘 쓰는데, 말하는 것은 시원치 않다. (10:10)

2) 다른 명성 있는 사도들에 비해 사도적 자질이 부족하다. (11:5)

3) 다른 교회들에게서 ‘탈취’하여 고린도 교회를 섬겼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사역한 일에 대한 비난) (11:8-9)

 

6. 바울은 이런 이유를 들어 자신을 깎아내리는 자들을 일컬어 ‘거짓 사도, 속이는 일꾼, 사탄의 일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비난에 맞서, 부득불 자기를 변호한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프고 속상하고 서운했을까, 그의 감정선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역하느라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피곤하고 힘들었을 텐데, 바울은 지금 자기를 그릇된 이유로 비난하는 자들의 비난을 듣고,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에 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서 ‘쓰담쓰담’ 해드리고 싶다. 힘 내시라고.

 

7. 바울은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난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과 고린도 교회가 그러한 터무니없는 비난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꾸짖는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10:7). 광명한 천사(외모만 뻔지르르 한 사람/말만 잘하고 실제 영성은 없는 사람/왜곡된 복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사람)로 가장하여 나타나 사역하는 척하지만, 결국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만 탐하는 자들의 비난을 듣고 그들의 말에 동조하여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고린도 교회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왜 바울을 비난하겠는가? 바울을 비난해서 그를 깎아내림으로 자기들이 높아지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건 정말 파렴치한 행위일 뿐이다.

 

8.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꾸짖으면서 아주 재미난 말을 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재밌게 다가왔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중매를 섰다고 한다. 고린도 교회는 신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인데, 신부에게 최고의 신랑감을 소개시켜 줬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참 난감한 일이다. 고린도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신랑감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신붓감이었을까?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아주 점잖게, 복음적으로 어퍼컷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신랑감에는 최고의 신붓감이 어울리는 법인데, 지금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신랑감에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9. 그렇다면, 바울의 목표는 여기서 더 분명해진다. 그의 목표는 최고의 신랑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바울은 본인이 약해졌는데, 본인이 약해진 이유는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면서 보통 약해질 때와는 다른 바울의 약함이다.

 

10.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에서 ‘너희’는 ‘고린도 교회’이다. 그냥 교회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울에게 교회는 그냥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작은 우주다. ‘덕을 세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οἰκοδομέω (오이코도메오)’이다. 이는 1차적으로 건물이나 집을 세운다(build)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upbuilding’이라는 단어를 쓴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몸 또는 건물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몸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또는 건물이 튼튼하게 세워지기 위해서 여러가지 요소들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덕을 세운다’는 말의 뜻은 성장과 성숙을 말하는 것이다. 몸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생명이 되어 행복을 누리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덕을 세운다’는 것은 최고의 신랑감인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인 교회로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11. 바울은 최고의 신랑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려다 보니 약해졌고, 최고의 신붓감인 교회를 사랑해서 덕을 세우려다 보니 약해진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연약한 교회의 덕을 세우려고, 교회를 너무 사랑해서 교회를 염려하고 교회를 향한 애타는 마음 때문에 약해졌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고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옥살이도 많이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 나는 수차례에 걸친 여행에서 강의 위험도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나는 또 수고와 곤고와 종종 자지 못함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때로 굶주림과 추위와 헐벗음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로도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3-28/우리말성경).

 

12.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구절은 마지막 절의 “이와는 별도로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이다.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이 바울의 마음을 염려하게 하고 애타게 했다. 여기서 ‘애타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퓌푸마이’인데, 이는 ‘내가 불탄다’의 뜻이다. 바울은 실족하는 형제/자매가 생겨날 때마다 마음이 불타듯이 아파했다. 바울은 바로 이때 자신이 약해졌다. 교회를 사랑해서 염려하고 애타는 마음 때문에 약해졌다.

 

13.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종류의 약함이 대개 목회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을 왜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는가? 그냥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목회지침이라고 하면 될 것을. 성경이, 바울의 이러한 약함을 담고 있는 성경이 교회 공동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이유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약함(weakness)’에 대하여 묵상하라고 주신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약해져야 한다. 아니, 그리스도를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다 보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14. 개인주의를 태동시킨 모더니티를 받아들여 형성된 미국의 복음주의(20세기 중반미국에서 생겨난 미국 백인 중산층 중심의 보수적인 기독교)는 교회론을 형편없이 축소시켰다. 그래서 미국의 복음주의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제 그 수명이 다 했다고 비판 받는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교회를 개인들의 집합소 정도로 전락시켰다. 교회를 종교적 욕망이 있는 개인들에게 그 욕망을 해소시켜 주는 종교적 서비스 업 정도로 생각하게 끔 한 것이 미국의 복음주의이다. 개인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마치 쇼핑하듯이. 그러다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를 만나면 거기에 등록하고 다닌다. 그러다 그곳이 식상해지면 새로운 교회를 찾아 나선다. (이게 모더니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새로운 것(modern/신상품)을 찾아 떠나는 현상.) 한국교회가 미국의 복음주의를 받아들여 기독교 생태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한 신앙의 생태계에서는 자아가 강한 그리스도인, 종교적 소비 욕망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질 뿐이지, 오늘 우리가 바울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를 높이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해서 ‘약해지는 그리스도인’이 세워지는 것은 힘들다.

 

15. 우리가 정말로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린도후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울의 약함, 바로 그 약함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세워져 나가면 좋겠다. 교회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이건 매우 기독교 교회론을 세속적으로, 모더니티의 영향 아래서 왜곡시킨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주님께 부름을 받아 교회의 몸이 되어 ‘함께’ 지어져 간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쁜데 시간을 내야 하는 것, 육체 노동, 감정 노동,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한 몸의 다른 지체를 섬겨줘야 하는 것, 다른 지체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하는 것, 때로는 다른 지체들의 불만과 불의, 불합리를 받아줘야 하는 것, 내가 가진 것을 관대한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 등등,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은 오히려 내가 약해지는 일이다. 주님만을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은 약함(weakness)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16.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반전이 있다. 우리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난다.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주 신비로운 고백을 하는데, 자신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 자신은 계속하여 약함 속에 자기는 내어주겠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는 통로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절). 그래서 우리는 ‘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쓰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읽는다. 이러한 존재의 신비가 우리의 삶을 휘감아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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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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