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타이틀 42 / Federal Title 42]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하고 나서 미국 연방정부는 타이틀 42라는 법령을 제정해서 미국 남부 국경을 통해서 망명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그들의 망명신청을 거부해 왔다.

 

AP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법 때문에 이민자들은 2020년 3월 이후에 190만 회 이상 추방되었다. 세상이 혼란해지면 사람들은 보수적인 자세(자기 생명을 먼저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 존재'로 불린다.

 

법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다. 법은 자기의 테두리 안에 있는 존재를 보호하지만, 자기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19세기 이후로 민주주의 체제가 각 국가의 운영 방식으로 들어서고 법치국가를 표방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법의 중요성은 더 부각되었다.

 

법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현대사회는 법 문제가 아주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고, 법 바깥으로 밀려나면 곧 죽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법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깊어졌고, 법의 테두리 바깥에 머무는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명명한 철학자도 생겨났다.

 

연방 타이틀 42에 의해서 코로나19 확산 방지의 목적으로 망명 신청 거부를 당한 이민자들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호모 사케르'이다. 그들은 법 바깥으로 밀려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그들이 경험했을 이중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자주 법조문과 성령의 법을 대조시킨다. 문자로 기록된 법령에 의해서 사는 자와 영혼에 새겨진 성령의 법에 의해서 사는 자를 대조시킨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은 법조문에 의해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자로 인식된다.

 

법조문과 성령의 법은 무엇이 다를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조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차별한다. 법은 자기 테두리 안에 들어온 존재를 보호하지만(물론 이것도 모호하다) 자기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법조문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성령의 법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안과 바깥이 없다. 포괄적이다. 그래서 성령의 법은 모든 존재를 구원한다.

 

개개인이 성령의 법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대인지 모른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법조문은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 있는 존재만 보호하고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에게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러한 법조문을 가진 사회에 살고 있더라도 개개인이 성령의 법 안에서 산다면 법조문이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 '호모 사케르'를 얼마든지 구원할 수 있다. 법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법,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기 보존 욕구가 강한 국가라는 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법 체계를 넘어선 성령의 법 안에 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더 중요하다. 국가(집단)은 자꾸 존재를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려 들겠지만, 그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를 성령의 법으로 다시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땅에 성령의 법에 의해 움직이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법이 법조문을 넘어서는 아주 강력한 사랑의 법이라는 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법 바깥에서 죽으신 분이고, 호모 사케르로서 이 땅의 모든 호모 사케르를 구원하신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성령의 법으로 산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연방 타이틀 42가 어서 빨리 폐지되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