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21. 07:00

열어 주소서

(누가복음 24:44-49)

 

누가복음, 하면, 세 가지의 이야기가 떠올라야 한다. 첫째는 ‘탕자 이야기’, 둘째는 ’삭개오 이야기’ 그리고 셋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이다. ‘탕자 이야기’와 관련된 찬송은 ‘나 주를 멀리 떠났다’가 있고, ‘삭개오 이야기’와 관련된 찬송은 ‘보고싶어 보고 싶어 예수님 얼굴~’이 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찬송은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가 있다. 성경의 유명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대개 회화(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가복음 24장은 부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죽은 후,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준비한 향품을 들고 예수의 무덤을 찾는다.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이들은 그 사실을 열한 사도에게 알리고, 그 중 베드로는 여인들의 부활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가 죽은 예수를 쌌던 세마포만 남은 빈무덤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길게 이어진다.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그들에게 부활의 현실을 알려주고, 두 제자는 열한 사도에게 달려가 예수의 부활을 알린다. 그러는 중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의 현실을 알린다. 여인들의 무덤 방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로 이어지고, 열 한 사도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며 그들에게 부활의 현실을 알려주시는 예수의 선포로 끝나는 이 부활 이야기의 정점은 44절에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44절).

 

예언의 성취. 이것은 누가복음이 가진 중요한 신학이다. 모세의 율법(오경)과 선지서, 그리고 시편을 비롯한 성문서, 즉 모든 구약성경(히브리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신학,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다. 44절의 구절 중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라는 말은 ‘신적 당위성이나 필연’을 말할 때 등장하는 단어이다. 한국어 어휘에는 이것을 대치할 만한 단어가 없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우리 나라 말에, ‘용안’이라는 말이 있고, ‘수라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임금(왕)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이 말을 아무에게나 사용하면, ‘역모’로 죽는다. 이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동사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쓰는 단어이다.

 

예언의 성취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부활은 신적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어떠한 것이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부활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처음부터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의심했다. 예수를 가까이서 따라다녔던 사도들도 처음에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선포하신 뒤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을 때”였다. 다른 말로 해서, 예언의 성취,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는 일이라고 고백하며, 또한 그것을 증언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일상이 기도 안에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침에 기상하자 마자 하루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성령의 능력 안에 있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고, 출근하면서도 기도하고, 업무를 시작하면서도 기도하고,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도 기도하고, 밥 먹을 때도 기도하고, 일과를 마치면서도 기도하고, 잠 자리에 들면서도 기도하고, 잠든 중에서도 이 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도를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몰아서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몰아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그것보다 더 좋은 기도의 습관은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짧게 기도하는 것이다. 000 집사님 가게에 심방 갔을 때 생긴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옆 가게로 잔돈을 바꾸러 간 000 집사님이 돈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갔더니 얘네들 기도하는 시간이에요. 바닥에 양탄자 깔아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얘네들한테 많이 배워요.” 여기서 얘네들은 누구겠는가? 무슬림들이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양탄자를 깔고 기도한다. 기독교인이 무슬림처럼 할 필요는 없지만,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계속하여 드리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야한다.

 

4월 말에 책이 한 권 나온다. 공저한 책인데, 그동안 가스펠 투데이(Gospel Today)에 실린 글을 모은 책이다. <예술신앙의 정원>, 이 책에 내 글이 7편 실린다. 책출판이 막바지에 있어 마지막으로 교정을 부탁하는 메일과 함께 출간되는 책의 교정판이 왔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내 글을 읽었다.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내가 이런 글을 어떻게 썼을까’이다. 도저히 내가 쓴 글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감사’였다. “나, 이런 감동적인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야”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사실 그렇다. 답답한 현실을 보면, 나의 부족함을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내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다 일이 잘 되면, 우쭐대기 십상이고, 일이 안 되면 낙심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우쭐과 낙심의 널뛰기를 하는 듯하다. 여기엔 감사와 평안이 깃들기 힘들다. 감정의 소모, 체력의 소모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쳐가는 삶을 살아간다.

 

요즘은 특히나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을 갖기 쉬운 세상이다. 온통 들려오는 뉴스는 ‘죽음’에 대한 뉴스, ‘폭력’에 대한 뉴스, ‘미움’에 대한 뉴스, 등 사람의 몸과 영혼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뉴스들 뿐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는 안 되고, 이 세상은 소망이 없으니, 그냥 나나 내 가족이나 잘 챙기자 하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한다. 그러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이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범죄로 표출된다. 우리가 지금 ‘아시아 혐오 범죄’의 타겟이 되어 있어 피해자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안에도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에서 오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얼마나 깊은 혐오가 자리잡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비관과 냉소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이 열리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 기도하는가? 무슨 기도를 하는가? 신적 당위성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뜻이 하늘에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기도하면서 상상해야 한다. 부활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비관과 냉소 속에서 자기만 살 궁리를 하겠지만,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비관과 냉소를 거부하며, 비록 지금 현실에서는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지만, 죽음(가장 큰 비관과 냉소)을 이기신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정혜윤의 책 <앞으로 올 사랑> 마지막 챕터에 보면 ‘바빌로프(Nikolai Ivanovich Vavilov)’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근과 감염병은 언제나 인류에게 큰 위협이었다. 러시아도 늘 기근과 감염병에 시달리는 나라였다. 바빌로프는 어려서부터 식물 표본과 어학 공부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는 나중에 특히 종자에 매력을 느껴 종자를 모으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종자를 모은다. 그가 종자를 모으면서 한 일은 “이상 기후로부터 작물을 지켜내는 법을 아는 농부들을 찾아 인터뷰를 했고 종자 심는 법을 배워 꼼꼼히 기록”한 일이다.

 

레닌 그라드에 식물 연구소를 차려 종자를 모으고 종자를 연구하여 기근을 퇴치하려는 꿈을 가졌던 바빌로프에게 큰 시련의 시간이 찾아온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에 의해 바빌로프는 잡혀가고, 바빌로프가 없는 상황에서 곧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종자를 지켜내기 위한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동분서주한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면 2백만 점이 넘은 보물 같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을 파괴할 거라 생각하고 관련자들 수백명을 투입해 박물관의 작품들을 옮기는 작업을 했지만, 정작 히틀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아니라 스탈린의 무관심 속에 놓여 있던 바빌로프가 모은 38만개의 종자였다.

 

누가보다도 비관적이고 절망적이고 냉소적인 상황이었다. 바빌로프는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에 의해 역적이 되어 총살형 선고를 받고, 종자를 보호해야할 스탈린은 종자에 관심이 없었고, 전쟁은 발발하여 독일군은 몰려오는 상황이었고, 추웠고, 배고팠다. 그러나,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끝까지 종자를 지켰다. 그 상황을 전하고 있는 문장은 이렇다.

 

연구원들은 문을 닫아건 채 얼어붙을 것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실에서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근무하며 계속 종자를 지켰다. 바빌로프의 동료 중 가장 헌신적이던 아홉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 (276쪽).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씨앗을 먹지 않았을까?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한 작가가 바빌로프의 동료였던 바딤 레흐노비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여러 달 굶주리는 동안 어떻게 씨감자를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었냐는 질문을 받은 레흐노비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하는 게 힘들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손발을 움직이기도 몹시 힘들었답니다. 하지만 씨앗을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럴 먹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씨앗에는 나와 내 동지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들어 있으니까요. (278쪽)

 

이에 대해, 정혜윤은 이런 문장을 이어간다. “그들은 씨앗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고 무화과나무가 되고 오렌지와 올리브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밀밭이 되는 모습과, 그것들이 빚을 받아 크고 튼튼해지는 모습과 벌과 나비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270쪽). 비관과 냉소 속에서, 지키고 있던 씨앗 종자들을 다 먹어버리고 함께 공멸할 수도 있었던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비관과 냉소가 가져다주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자신들을 내몰지 않고, 씨앗이 품고 있는 그 가능성들을 상상하며 끝까지 그것들을 지켜냈다. 죽음으로!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고, 그 어두운 마음 때문에 폭력과 혐오가 판을 치고,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들 만의 안위를 챙기려는 이기심이 극도로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부활 신앙이 더 필요한 이유는 그 비관과 냉소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서 갖게 되는 비관과 냉소를 물리치고,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열어 주시면,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안 될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기 전에, 기도하고 하라. 그러면 그 일을 마친 뒤에,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냈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열어 주셔서 할 수 있는 거야!”라는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한 감사가 쌓이면, 다른 사람을 혐오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비관과 냉소 가운데 폭력과 혐오와 극심한 이기주의로 치달을 수 있지만, 부활 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께서 열어 주실 것이고, 주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감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부활의 신앙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하기 전에, 짧게 기도하는 습관을 세우라. “주여, 열어 주소서. 주여,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주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일을 행하게 하소서. 주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이 판을 치는 시대에, 부활 신앙을 통해 비관과 냉소를 물리치고, 매순간의 기도를 통해 삶을 감사와 평안으로 채우며, 냉소와 비관을 잠재우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시 세워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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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