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19. 10:24

예수님과 기도

(요한복음 17:11-21)

 

복음서에 대한 상식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고 싶다. 마태, 마가, 누가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큰 아들 건유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복음서를 읽으면서 나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왜 이렇게 똑 같은 이야기가 계속 나와?” 맞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읽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요소이다. 같은 이야기가 세 복음서에 걸쳐 동일하게 나온다. 물론, 같은 이야기가 각 복음서의 맥락에 따라 좀 다르게 배치되긴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세심한 맥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선 읽어보면, 같은 이야기가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온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르지 않고, 제 4 복음서라고 부른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다. 맥락도 많이 다르다. 그래서 같은 ‘복음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이질적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르지 않고, 따로 떼어서 제 4 복음서라 부른다. 대표적으로,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은 유월전 만찬을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떼어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성만찬 이야기가 없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깊은 고뇌 속에서 기도하신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이야기를 전한다. 똑 같은 상황, 즉 체포당하기 전 상황인데,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다른 기도를 전한다.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는 죽음을 앞둔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기도인 반면에, 요한복음의 기도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염려하시는 내용의 기도이다.

 

사실, 두 기도 모두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기도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 맡겨드리는 신뢰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남겨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염려의 기도를 한다. 개인의 실존적 고뇌의 기도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기도, 그리고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의 기도는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얼마나 하셨을까? 우리는 그것을 수치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기도를 자주 하셨고,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또한, 중요한 사역을 앞두고 반드시 기도하셨다. 특히 누가복음은 그것을 매우 자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전하면서, 먼저 그 사역을 하기 전에 기도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있다.

 

중요한 일을 놓아두고 우리는 얼마큼이나 기도해야 할까? 그것이 한 때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큼 기도하셨는지, 자세히 살펴보니, 예수님은 그 때 3시간 정도 기도를 하셨다. 이것도 모든 복음서가 전하는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에 근거해서 보면 그렇다. 아무튼, 그것에 근거해서 아주 간단한 산술적인 기도 시간을 산출했다.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적어도 3시간은 기도해야 한다는 것.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고별설교와 마찬가지로, 유언기도이다. 성경의 말씀이 살아 숨쉬게 하려면,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한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감성을 살려서 읽어야 한다. (적극적 읽기 / “주여 말씀하시옵소서”의 마음과 “혹시 말씀하시면 들어볼게요”의 마음은 다른 거다.) 그것만 잘해도, 우리는 성경 읽기를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유언기도.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유언기도라는 것을 생각하며 감성을 살려 읽으면, 예수님의 기도가 남의 이야기로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가슴 절절한 사랑의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유언에는 핵심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유언에 불필요한 말을 남기는 사람은 없다. 유언에는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유언기도에 담긴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유언기도에서 가장 핵심 구절은 21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상호내주. 이것은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다. 상호내주의 개념은 우리가 ‘신God’이라는 것을 다른 종교와 다르게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상호내주의 개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핵심 개념이다. 또한, 더불어 우리가 추구하는 영성은 상호내주의 영성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객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 안에 내주한다.

 

바로 이 상호내주의 개념 때문에 기독교인의 기도는 다른 종교의 기도와는 다르게 매우 특별하고 특이한 기도가 된다. 우리가 이 상호내주의 개념을 잘 모르면, 우리는 기독교인이면서 이방인처럼 기도하게 되는 불행한 일을 겪는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떠한 신에게 멀리 떨어져서 기도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신에게 기도하게 되면, 그 신은 나의 기도대로 무엇인가를 해주는 수여자(giver)가 될 것이고, 나는 그 신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받는 수동적 수혜자(receiver)가 될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할 때가 많다. 그리고 기도를 그런 수준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바로, 예수님의 유언기도 때문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덕분에,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수여자와 수혜자 관계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분리된 기도를 드리는 게 아니라, 상호내주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상호내주의 기도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들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행위의 기도를 말한다. 상호내주의 기도,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수여자로 만들고, 기도하는 우리를 수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상호내주의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드리는 주체적인 기도이다.

 

이게 얼마나 강력하고 신비하고 놀라운 기도인지,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이 상호내주의 기도를 알지 못하고 기도를 드리면, 우리의 기도는 기복신앙의 기도에 머물고, 기도의 역동성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기에 기도가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상호내주의 기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사역이 되지 못하고, 그저 고역(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하는 기도)에 머물 뿐이다. 상호내주의 기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저 구경꾼으로 전락할 뿐이다. 그리고, 기도를 하되, 우리가 수혜자로서 무엇인가 필요할 때만 기도하는 매우 낮은 단계의 기도에만 머물고 만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기독교인의 기도가 얼마나 강력하고 신비롭고 놀라운 것인지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 말이다. (이는 마치 복권에 당첨됐는데도, 복권이 당첨됐는지 모르거나, 당첨복권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기도한다. 우리는 기도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그렇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존재로서 기도한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도가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위대한 기도가 된다.

 

이게 왜 중요한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역사의 주인이시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게 하시며, 창조의 완성을 이루시며, 모든 것을 악으로부터 지키시고,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를 구원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상호내주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그 상호내주의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리고 상호내주의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은 그냥 한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만물을 구원하는 구원사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상호내주의 기도는 바로 그러한 일을 동일하게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강력하고 신비롭고 놀라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의 의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내가 당신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당신의 삶 속에 지금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기도를 통하여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거룩한 선포인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나는 두 가지의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우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우리는 평소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산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괴로워하거나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러니, 외로워하거나 힘들어 하지 말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것을 믿고 감사하라.

 

또 하나, 나는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감사하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상호내주의 기도를 알고 기도해 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사람의 기도는 그냥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는 개인적 기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선포가 될 테니 말이다. 이것만큼 든든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한,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한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 나의 기도는 그냥 나의 가녀린, 부족한 기도가 아니다. 나의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드리는 상호내주의 기도이다. 그리고 나는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삶에 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니, 기도하는 그 시간이 가장 기쁘고 즐겁고 보람찬 것이다. 여러분 각자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사역(ministry)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그냥 기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호내주의 기도,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기도라는 것을 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 중 하나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고맙다. 그 사람의 기도를 통해 나의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거룩한 삶이라고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동일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한다. 그리고 선포한다. 여러분의 삶은 그냥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거룩한 삶이다. 그러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리고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임을 잊지 말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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