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9. 02:55

우리는 성도입니다

(하박국 2:1-4)

 

교회력이라는 게 있다.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25번째 주일이기도 하지만, ‘만성절(All Saints Sunday)’이기도 하다.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23).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다른 것이 충만해서는 안 된다. 오직, 교회는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한국에는 차례라는 풍습이 있다. 고조부까지 4대의 신주를 모셔 놓고,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려 드리는 풍습이다. 차례를 지내는 과정 중 합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조상님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참사자들(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제청 밖으로 나가고 문을 닫거나, 제상 앞에 병풍을 가린 후 모두 엎드린다. 그러면 조상님들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내는 이유는 조상님들의 영혼을 잘 달래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야 조상님들이 살아 있는 자손들의 만사를 잘 돌봐주어 모든 일이 형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제사는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드렸고,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 때마다 드렸다. 물론 요즘은 명절 때만 차례를 드리는 풍습으로 바뀌었지만, 옛날에 종갓집 며느리는 제사상 준비하느라 인생을 모두 보낼 정도였다.

 

우리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문명이든 돌아가신 조상들에 대한 예법이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켈트어 문화권(오늘날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에서 지켰던 삼하인(Samhain)이 그것이다. 고대 켈트인들의 달력에 의하면, 새해는 111일에 시작한다. 그리고 새해를 시작하면서 어둠의 6개월이 전개되는데, 바로 이 때 영적인 존재들이 땅으로 내려와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조상의 영혼이 다시 집을 찾아오는 날이라고도 생각했다. 이들이 심술을 부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막아낼 방법들도 고안해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1031일날 지키는 할로윈의 유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이 할로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할로윈 데이할렐루야 데이’ (우리교회에서는 Saints Night)라고 바꿔 부르며 그날을 지킨다. 그런데, ‘할로윈은 세속적인 언어가 아니고 매우 기독교적인 용어이다. 켈트어로 할로우(Hallow)성인(Saint)을 가리킨다. 여기에 전야라는 뜻의 ‘eve’가 붙어서 할로윈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로윈이란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무엇인가를 기리는 날의 전야제라는 뜻을 담고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전야제를 갖는다. 분위기가 최고조다. 할로윈은 성인들을 기리는 전야제를 갖는다. 물론 전야제이기 때문에 분위기 최고이다.

 

기독교인들은 켈트족에게 복음을 전한 뒤, 영적인 존재나 죽은 조상들을 기리는 삼하인이라는 풍습을 받아들여, 그날을 기독교의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로 삼아 할로윈을 만들었다. 그것이 7세기와 8세기에 걸쳐서 생겨난 기독교의 전통인 만성절(All Saints Day)’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만성절 예배를 드리며 그와 연관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워낙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켈트문화와 연관된 기독교 전통이다 보니, 한국교회에는 생소한 기독교 절기일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다 보니, 한인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를 맞아 사람들이 기괴한 데코레이션과 기괴한 분장을 하는 것은, 그날의 분위기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유령 또는 우리 말로 귀신을 표현할 때 우리는 흔히 기괴한 상상을 하게 된다. 기괴한 분장과 함께 각 집을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을 말하는 것은, ‘맛 있는 거 주지 않으면 장난칠거야라고 하는 것인데, ‘영혼을 달래주지 않으면 네 인생에 장난칠거야라는 영적인 존재의 위협이 담겨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미신적인 요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재미로 그렇게 할 뿐이다.

 

할로윈(만성절)도 성탄절처럼 세속화되었다. 할로윈을 맞아 장사치들은 한 몫 챙기려는 마음만 있지, 할로윈(만성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와 관련된 프랙티스(practice)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할로윈을 단순히 재미로만 보낼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에 충실해서 기독교의 성인을 기리는 엄숙함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에 휩쓸리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을 거슬러 신앙의 가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성인의 규정은 기독교 전통(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마다 다르다. 우리는 개신교회이기 때문에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성인(Saint)’ 또는 성도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만성절을 지킬 때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크리스천들을 기념한다.

 

감리교 전통에서는 성인(聖人)들뿐 아니라 그 교회에서 돌아가신 분들 역시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로 지키기도 한다. 할로윈으로부터 시작되는 만성절은 이 땅을 걸어간 믿음의 선조들, 지금도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성도의 삶을 기념하며 격려하는 날이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성도라고 부른다. ‘성도라는 말에는 신실한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성도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말이다. 구약의 언어(히브리어)로 이들을 하시딤(hasidim)’이라고 부르는데, 하시딤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헤세드(hesed)’에서 왔다. 헤세드는 영어로 ‘steadfast love’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인자라고 번역한다. ‘성도(Saint, 하시딤)’란 인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인데, 특별히 인자(헤세드)’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인자란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실신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고 변함없으신 사랑을 궁극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고 변함없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경에서는 신실하고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도를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일컫고, 의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성인)’의인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성도의인과 다른 차원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 알아, 요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보편적인 성도의인의 의미와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의 거리감을 좁혀나가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지복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지복이란 궁극적인 복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인간에게 궁극적인 복이란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은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지복을 받은 사람들로 묘사된다. 모세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 사무엘도 엘리의 문하생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신약시대로 넘어와서 구약의 성도의인의 개념은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성도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고백했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도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 즉 성도답게, 의인답게 살았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 보자.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성도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직접 대면한, 즉 예수를 믿는 성도의인의 삶과 많은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다른 것이 세속화가 아니라, 이것이 가장 궁극적이고 가슴 아픈 세속화이다.

 

22. 이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신앙은 귀신놀이가 아니다. 신앙은 교양도 아니다. 죽은 조상님들에게 차례 지내는 것 같은 미신적인 풍습도 아니다. 신앙은 신적인 존재를 통하여 세속적 이익을 취해보려는 얄팍한 처세술도 아니다. 신앙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려는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즉 인자를 경험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생명의 몸짓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행위이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또는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성도란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자한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신실하고 변함없는 삶을 사는 존재이다.

 

만성절 주일(All Saints Sunday)을 맞아,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성도(Saint)’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실하고 변함없으신, 즉 인자하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내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느끼고 깨닫는가가 다를 뿐이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복, ‘지복을 받은 사람이다.

 

못 봤는데, 봤다고 우기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봤는데 본 줄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어리석은 자로 살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b). 그리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복된 자이므로, 복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만성절 주일(All Saints Sunday)’을 지키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복이 다시 한 번 넘치길 축원한다. 우리는 만성절을 맞아 서로가 서로를 축하해 주고, 복을 빌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성도의 삶이, ‘의인의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자. “우리는 성도입니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복된 인생을 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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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