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다른 질문을 먼저 던져보자. "우리는 왜 영어 공부를 하는가?"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 공부하는 이유를 물으면, '입시 시험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일차적으로 '소통'을 위한 것이지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배울 때, '소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시험'을 위해서 배운다.

 

이제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를 물어보자.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대부분, '구원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위에서 언어의 존재 이유를 '시험'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존재 이유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을 간과하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시험'으로 오해되고 만다.

 

한국에서 영어가 '시험'을 위한 도구로 쓰이니, 한국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지 영어로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어는 시험이기 때문에, 소통 위주의 영어가 아닌 '시험' 위주의 영어를 배우다 보니, 영어가 어렵게 느껴진다. 실제로, 시험에서 다른 이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일단 시험 문제가 어렵게 출제되어야 하고, 그 어려운 문제를 맞혀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읽으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성경의 언어를 배워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는 일은 중요하지 않고, 성경의 지식을 통해서 구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과제만 안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성경은 온통 현실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면서 천국을 보려 한다. 구원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 죽음 후에 있는 것으로 현실에서 밀려나기만 한다. 성경읽기가 구원에 대한 '시험'으로 전락할 때 발생하는 일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언어'. 그리스도인은 언어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한다. 사실, 소통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이다. 내 삶의 현실에서 성경의 언어, 언어 그 자체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면, 우리의 현실은 이미 구원에 이른 것이다.

 

성경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우리가 일반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옹알이에서 시작해, 어려운 것을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성경 언어도 그렇게 배운다. 물론 옹알이만으로도 부모와 아이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부모는 아이가 '생명'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이처럼 성경 언어의 옹알이 만으로도 하나님과의 소통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장성하며 옹알이 수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인은 장성하며 옹알이 수준에만 머물 수 없다. 성경 언어 능력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소통이 깊어지면,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가히 폭발적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이 그 '소통'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구원'이라는 '시험'의 관점에서 성경 읽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소통'의 관점에서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성경 언어의 능력이 깊어질수록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그 부요한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신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무수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한 그 창조성의 발현,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