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18. 11:16

잘생긴 모세

(출애굽기 2:1-10)

 

1.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각각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장에서는 7일간에 걸친 창조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데,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고 나서 인간은 제6일에 창조된다. 제 6일에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그리고 2장에서는 인간 창조에 대한 사뭇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1장과는 달리 남자가 독처(혼자 지내는 것) 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시고, 남자에게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어서 주시는 것을 본다.

 

2. 창세기 2장의 이야기를 보면,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이후에 여자가 창조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든 것으로 나온다. 하나님은 아담(남자/이쉬)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든 여자(하와/이샤)를 이끌어 아담에게 주신다.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여자(이샤)를 보고 아담(이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4-25).

 

3. 인간 창조에 대한 이 두 이야기는 분명 인간의 본성, 특별히 사회적 본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본성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일,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본성(fundamental nature) 이라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본성(nature)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면, 그렇지 않고서 출애굽기 2장의 시작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4. 요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는 출산율의 저조이다. 출산율 저조로 인하여 한국은 지금 ‘인구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별로 안 할 뿐 더러, 결혼을 해도 아기를 갖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낳지 않으니, 인구절벽을 경험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사회가 고령사회로 변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미래이다. 그런데,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보면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결혼을 하거나 아기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너무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인간의 번영은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도 가장 마지막 날인 제 6일에 이뤄진 것 아니겠나.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5. 출애굽기 2장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고된 노동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왕의 명령으로 인하여 사회적 집단 살해(genocide)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으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것일까. 너무 무모해 보인다. 1장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끔찍한 말로 끝나지 않는가.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무슨 병아리를 낳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낳는 것인데,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꼼짝없이 죽여야 할 상황인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일은 매우 무모한 일이고 비상식적인 일처럼 보인다.

 

6. 분명 수많은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던져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 더 윤리적인 행동 아닌가. 아기를 낳으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낳는 것 자체가 살인 아닌가.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본성만 생각하고 태어날 아기에 대해서는 너무도 배려를 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들인가. 출애굽기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기는 출산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7. 모세의 출생 이야기가 담긴 출애굽기 2장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2절이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레위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았으니 마땅히 나일강에 던져 죽여야 한다. 그런데 죽이려 보니까 그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살려 두었다. 그러면 그동안 못생긴 남자 아이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일까. 못생기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 현빈이나 송중기, 정우성 같은 남자만 살아남고 나머지 남자들은 다 죽어야 하는가. 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이 보면서 딱 걸려 넘어지기 쉬운 구절이다.

 

8. 모세에게 붙은 수식어, “잘생긴”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외모가 수려했다’는 뜻일까. 잘생긴’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레위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잘생긴 아이(fine boy. Fine child, beautiful child)’였다. ‘토브’가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 1장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면서 ‘좋다(토브)’라고 하시며 흐뭇해 하셨다. 출애굽기가 창세기와 분리된 성경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성경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는 아기 모세를 보고 ‘잘생긴(토브)’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모세의 탄생, 또는 모세는 새로운 창조이고 창조의 활동이다. 아기 모세에게 ‘토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그를 통해 무엇인가 예상할 수 없는 ‘창조의 일’이 발생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9. 창세기 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다. 세상은 죄로 가득했고,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한탄하시며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는 계획을 당대의 의인 노아에게 알려주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토브)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의 일을 시작한다. 바로, 방주(ark)를 만드는 일이었다. 노아는 방주를 창조해 피조물들을 구원한다. 이처럼 창조에는 구원의 목적이 담겨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창조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구원의 개념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곧 구원 행위이다.

 

10. 모세의 탄생이 창조와 구원의 드라마라는 것은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토브’한 아이는 점점 성장했고, 3개월이 지나자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서 ‘갈대 상자’를 만든다. 상자(테바)는 노아가 만든 방주와 같은 단어이다. 노아는 사람들(피조물들)을 홍수(물)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테바(방주)’를 창조했고, 모세의 가족들은 모세를 나일강(물)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테바(상자)’를 창조했다. 모세의 갈대 상자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의미이다. 물에 의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11.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모세의 가족들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낸다. 모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단 나일강에 바로 던진 것이 아니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풀어놓아 죽음을 지연시키긴 했어도 결국 죽게 될지, 아니면 구원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토브(선함/아름다움)’가 등장한다. 이집트 왕(바로)의 딸의 마음이다. 나일강에서 목욕하던 바로의 딸은 갈대 상자 안에 놓인 ‘히브리 사람의 아기’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

 

12. ‘히브리 사람’은 ‘노예 계급’이라는 뜻이다. 왕족이 노예 계급을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왕의 명령까지 있던 상황에서 왕의 딸이 노예 계급의 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를 죽이지 않고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아들로 삼는 것은 단순히 훌륭한 일이 아니라 ‘새창조의 역사’이다. 창조의 일은 이렇게 ‘토브’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어떠한 선한 일, 아름다운 일, 그래서 생명이 살아나고 풍성해지는 것을 보면 단순히 좋은 일,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토브(선하고 아름다운 것)’는 하나님의 창조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만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토브(선하고 아름다운 것)’를 경험했거든, 주님을 찬양하라.

 

13. 잘생긴 모세. 이것은 모세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잘생긴 모세. 이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신학적 진술이다. 고된 노동과 살해의 위협 속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토브’가 임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14.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신다. 잘생긴 모세의 탄생, 그것이 그 증거이다. ‘토브’가 탄생했다는 것,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생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죽이지 않고,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 갈대 상자를 창조했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의 갈대 상자는 이집트 왕의 딸을 통해 ‘구원’을 성취했다. 모세의 이름은 뜻은 ‘물에서 건져냄’이다. 이 이름은 앞으로 발생할 또다른 창조와 구원에 대한 예언이고 기대이다.

 

15. 지켜야할 소중한 것이 있는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인생/삶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자기 몸을 쓰다듬으며, ‘사랑해’라고 말해보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나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 친구들, 일터, 나라, 지구. 그리고 우리 신앙의 공동체 교회. 죽음의 위기에 처해져 있었지만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가족들의 사랑 덕분에 모세는 살았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구원의 은총이 임했다. 그래서 모세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양이 되는 인생이 된 것 아닌가.

 

16. 우리도 모세처럼 잘생긴 사람이 되면 좋겠다. 사실 우리는 이미 잘생긴 사람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품에 안긴 우리들을 보고 하나님은 이미 ‘토브’라고 말씀해 주셨다.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 잘생긴 사람.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창조의 일을 하고, 구원의 일을 하는 사람.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는 사람. 그리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고 보았을 때,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 그렇게 우리 모두 잘생긴 사람이 되면 좋겠다. “당신 참 잘 생겼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