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22. 1. 12. 09:43

[시론]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 – 불의의 가위에 맞서는 신앙의 주먹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예술을 파멸시켜라. 백치들을 고용하여 차가운 빛과 뜨거운 그림자로 그리게 하라. 가장 졸작에 제일 높은 값을 주고, 뛰어난 것을 천하게 하라. 그리하여 무지의 노동이 모든 곳에 가득 차게 하라.

 

ㅡ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 부분,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에 수록

 

지난 정권 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소위, 예술검열이 그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국악원 등 공공기관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연출가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거나 그 연출가의 작품 공연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는 게 세상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은 바로 그 사건에 대한 ‘저항시’이다. 위의 인용한 구절은 예술검열을 주도한 관료들의 비뚤어진 정신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 당시 예술인들은 ‘예술검열’ 사태에 맞서 ‘권리장전 2016_검열각하’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2016년 6월 9일부터 10월 30일까지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20개 극단의 참여로 21개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때 소극장 문 앞에는 이런 포스터가 붙었다. “검열의 가위에 맞서는 연극의 주먹”. 예술인들의 저항 문구답게 매우 창의적이고 위트 있는 문구였다. 장수진의 시는 그때의 저항을 ‘매미와 개미’를 주연으로 해서 마치 연극 한 편을 상영하는 듯 묘사하고 있다.

 

시에는 검열 당국을 향한 저항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끝내 나를 죽일 셈인가 /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네 / 날개를 가진 내가 친구와 함께 땅을 기어가는 것이 / 그리도 불편한가 / 그러나 너의 열등감은 / 너와 나를 함께 죽일 것이다.” 국가는 정치적인 이유로 불편한 예술인들을 죽이려 들지 모르지만, 그 행동 자체가 결국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하게 될 거라는, 예언자적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일은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 시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항시를 쓰는 일은 이육사나 김수영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저항시 쓰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저항은 계속되어야 한다. 신앙은 저항이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한국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라고 말했듯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신앙을 갖는 이유는 우리를 고난으로 밀어 넣는 존재(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에 대하여 저항하기 위함이다.

 

시인은 시에서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예술을 파멸시켜라”라고, 예술가 답게 말하고 있다. 신앙인은 신앙인의 관점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신앙(종교)을 파멸시켜라.”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어느 시대든 불의한 통치 세력은 종교를 탄압했고 예술을 검열했다. 그것이 인간성을 파멸시켜 자신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통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성이 훼손되고 문화가 쇠퇴하며 나라가 망해 가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신앙인(종교인)과 예술인에 대한 탄압이 가장 먼저 자행되었다. (또는 신앙인과 예술인의 타락이 두드러졌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는 자칫 물질의 복을 받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모든 것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세상만큼 짐승 같은 세상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의 자본주의를 ‘야수 자본주의’라 부르지 않는가. 야수에 물려 죽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신앙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신앙은 저항이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신앙인은 ‘불의의 가위에 맞서는 신앙의 주먹’을 내는 자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