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권 교회의 몰락]

 

1991년 성탄절 다음날 12월 26일, 소련은 해체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서구사회의 시각이다. 동구권의 정교회에서 성탄절은 1월 6일이다. 동구권의 시각에서 보면, 성탄절이 임하기 전,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국, 즉 소련의 해체는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의 해체의 시발점이었다.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제도권 사회주의국자들은 줄이어 해체된다. 소비에트(소베트)라는 말은 원래 참 좋은 말이다.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 자치기구를 일컫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즉 소비에트 연방국이란 외면적인 뜻으로 보자면,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 자치기구들이 연합하여 이룬 국가라는 뜻이다. 우리가 요즘 그토록 입에 달고 사는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는 외면적으로는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 자치기구들의 연합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하여 장악된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노동자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소수의 권력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체제인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이 몰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제도권 교회의 몰락은 제도권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많은 면에서 닮아있다. 제도권 사회주의국가가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국가가 모든 것을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 폭력수단, 그리고 정치수단. 제도권 사회주의국가가 서구 부르주아국가들 보다 더 폭력적인 이유는 모든 수단을 국가가 독점하여 민중들(노동자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서구 부르주아국가(자본주의국가)들은 생산수단의 독점은 자본가, 폭력수단과 정치수단의 독점은 국가가 하고 있어, 독점의 구조가 이원화되어 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보다 좀 덜 폭력적이다. 물론 오십보 백보이지만 말이다.

 

제도권 교회의 몰락은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처럼 자명해 보인다. '제도권'이라는 말에는 이미 '독점'의 의미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회에서 교회 정치는 목회자들이 독점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 나라(하나님 국가)에서 파견된 일종의 에이전시로 활동하며 하나님 나라가 전해주는 모든 권세를 독점적으로 행사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구원이 그들에 의해 독점된다.

 

사실, 이러한 독점체제를 뒤엎은 것이 종교개혁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외쳤던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구원을 '민중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요즘, 그러한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온데 간데없어졌고, 오히려 중세시대의 제도권 교회보다도 더 혼란스럽고 유치한 방식으로 구원이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듯하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 이것은 그 당시 구원을 독점하고 있었던 제도권 종교세력들에 맞서 구원을 민중들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한 선포였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폭로하고 앗아가려는 예수의 구원행위에 맞서 그 당시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사도 바울이 "믿음에 의하여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구원론을 전개했을 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구원의 보편성, 즉 구원은 어떤 개인이 또는 어떤 세력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은 어느덧 제도권 교회 안에서 왜곡이 되었고, 믿음이라는 제도적 용어로 인하여, 구원이라는 제도적 용어로 인하여 배제와 혐오의 논리가 되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이러한 배제의 원리가 지금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 지금 저 하늘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눈물 흘리고 계실 것이다.

 

구원을 누가 독점할 수 있는가. 누가 구원의 수단을 독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노동자 사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발생한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그리고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빼앗긴 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다. 노동력만 남은 노동자는 먹고살기 위해 자본가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다. 일 자리를 달라고.

 

이처럼, 구원수단을 독점한 성직자 그룹과 구원수단을 빼앗긴 평신도 사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발생한다.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 그리고 구원수단을 독점한 성직자는 구원수단을 빼앗긴 평신도를 착취할 수밖에 없다. 구원수단이 없는 평신도는 구원받기 위하여 성직자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다. 구원해 달라고.

 

구원과 구원수단은 어느 한 개인이 또는 어떤 집단이 독점할 수 없다. 그것이 그리스도 정신이고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이지, 구원을 독점한 이들의 집단이 아니다. 예배는 구원에 대한 감사이고 찬양이고 기쁨이지, 구원 받은 것에 대한 확인이 아니다.

 

목회자는 구원 받은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이지, 구원을 독점하여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회가 제도권 교회가 되어 구원을 독점하려 든다면, 목회자들이 제도권 교회 내에서 구원을 독점한 정치세력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 드는 한, 제도권 교회는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처럼 한 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구원과 구원수단을 민중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반한 제도권 교회는 민주주의가 꽃피는 사회에서는 발을 붙일 수 없다.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제도권 교회 안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회의 몰락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은 영원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