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28. 11:41

죄와 은혜와 구원

(에베소서 2:1-10)

 

(요즘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 기독교 신앙(우리의 신앙)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데, 첫번째 시간에는 ‘공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두번째 시간에는 ‘성령을 통하여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의 말씀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되살려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성경과 우리 시대는 2천년이라는 간격이 있는데, 그 간격을 메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발견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쉬운 작업은 아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제목’을 정하는 일은 늘 어려운 과제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 ‘죄와 은혜와 구원’은 정말 무거운 제목이다. 이는 단순히 ‘죄와 은혜와 구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죄와 은혜와 구원’이 오늘 우리가 사는 21세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인간론(인간이란 무엇인가)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구원론(구원이란 무엇인가)기독교 윤리(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종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과히, 기독교 신앙의 종합선물세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인문학 공부 열풍이 불었는데, 사실 인문학이란 단순한 ‘교양쌓기’가 아니라 ‘인간공부’이다. 인문학은 그 끝에서 ‘종교’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종교의 가르침을 제외시키면서 인간이해를 깊이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인간론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준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인다. 본문에서도 보면, 인간이 처한 상태는 매우 비참해 보인다. 다음 한 마디가 인간이 처한 상태를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본질상’이라는 말은 헬라어 ‘휘시스’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태생으로 결정된 조건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을 해석하면, 마치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원죄(original sin)’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매우 큰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진노를 받게 되는 존재는 마치 아무렇게나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처럼, 그 사람의 인격이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허가증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네 죄를 고백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어!” 이는 마치 구원이란 스스로 인간성을 짓밟는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신의 은총인 것처럼, 구원을 호도한다. 성경의 언어가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못 알아차리고, 그냥 문자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실수에 얼마나 많이 희생당했는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진노의 자녀’로’, 마치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그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진다. “내 인생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해. 나는 진노의 자녀이니까.” 그러면서 내가 당하는 고통에 한 마디 저항도 못하고, 그 고통을 순응적으로 감내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과연, 성경의 언어는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기력하게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말면, 우리는 우리에게 임하는 고통의 이유를 모두 우리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고 만다. 이런 시가 있다.

 

다리 위의 아가씨

 

우리 아버지는 왜 부자가 아니고

우리 엄마는 왜 미녀가 아니었을까?

 

저녁 강물이 어룽어룽

밀물져 돌아온다.

 

(황인숙의 시집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에 수록)

 

현대사회에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는 시이다. 어떤 차별을 당하는 아가씨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차별의 이유를 부모님에게서 찾는다. 참 슬픈 장면이다. 부자 아빠를 두지 못한, 예쁘지 못한 엄마를 둔 이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라, 이 아가씨를 차별하는 사회(사람들)의 잘못인데, 아가씨는 그 고통의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의사들이, 또는 과학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가? “unknow(이유를 알 수 없다)”이다. 우리는 이유 없이 병에 걸리고, 이유 없이 사고를 당하고, 이유 없이 죽는다. 우리는 살면서 이유 없이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겪는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람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내 죄 때문에’이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내 삶이 이리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어떠한 고통이 발생하면, 그 고통이 주는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깊은 죄책감 때문에 더 힘들어 한다.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을 고르라고 하면, 단연 <욥기>가 뽑힐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장 심오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인간 실존과 관련해서,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가장 고민하는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심오한 이야기는 욥기가 풀어내고 있다. 욥은 남부러울 것없이 부자로 살았다. 부자는 단순히 물질이 많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풍요롭고 건강했다는 뜻이다. 왜 욥은 그렇게 부자로 살았을까? 그가 의인이어서? 의인이어서 보상으로 부자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욥이 부자로 산 것은 그저 ‘은혜’이다. 까닭이 없다.

 

부자로 살던 욥은 하루 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된다.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지 못한, 비참한 상태에 처해졌다는 뜻이다. 욥은 왜 고통 당하고 있는가?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통해서 전개되는, 욥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통의 이유를 죄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친구들의 논리를 거부한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욥은 왜 고통을 받는가? 답은 “까닭 없이”이다. 그래서 욥기는 고통 또한 “까닭 없이” 주어진 “은혜”라고 말한다. 우리는 은혜를 대개 좋은 일이 발생했을 때만 쓴다. 까닭 없이 좋은 일을 겪었을 때 우리는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기는 좋은 일만 ‘은혜’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일도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가 가진 기본적인 뜻은 ‘까닭 없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욥은 말한다. 자신에게 까닭 없이 고통이 왔고, 나중에 욥기서 42장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또한, ‘까닭 없이’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 그는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다(은혜를 입는다).

 

원인 모르게 우리의 삶은 아프다. 까닭 없이 아프다. 지난 목요일(6월 24일 새벽 1시 30분쯤)에 플로리다에 있는 한 콘도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됐다. 샌드위치처럼 건물이 내려앉아 구조작업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다치거나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까닭 없이 고통을 겪는다. 원인 모르게 우리의 삶이 아프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인 모를 구원 아니겠는가. 까닭 없는 구원 아니겠는가.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고통도 은혜고, 구원도 은혜다. 이것은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심오한 진리이다.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바로, 보이지 않는(영이신)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성육신 하신) 은혜’의 징표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구원을 눈으로 본다. 누가복음은 노인 시므온의 입술을 통해서 그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구원론. 기독교의 구원론은 아주 신비한데, 구원이 눈에 보인다(구원을 우리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눈으로 보게끔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한다. 이게 참 이상한 거다. 돈이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은 있어도 예수가 곧 구원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보면서도! 기독교의 구원론은 한 가지 단어로 설명된다. 은혜(카리스)”. 은혜’는 ‘감동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까닭 없는”이라는 뜻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은 까닭이 없다. 즉, 은혜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해서 우리가 고통에 처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까닭 없이, 이유 없이, 은혜로 우리의 삶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슨 착한 일을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좋은 일을 해서 구원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이유 없이 은혜로 우리의 삶에 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정리): 기독교의 인간론. 우리는 까닭 없이 고통 당한다. 우리는 은혜로 고통 당한다. 기독교의 기독론. 구원이 눈에 보이게 임했다(우리의 감각이 알아볼 수 있게 임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게 임한 구원을 못 알아본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눈에 보이게 임한 구원을 눈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론. 우리는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믿는 자들을 어떠한 특별한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 그것을 기독교 윤리라고 부른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삶이 바로 ‘포이에마의 삶’, 즉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삶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절).

 

기독교 윤리. ‘포이에마’의 삶. 그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모호한 것은 ‘무엇이 선한 일(선한 삶)인가’이다.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 <Dogville>을 예로 들어보려 한다. 니콜 키드먼 주연인 이 영화는 매우 독특한 배경과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일단 영화의 배경은 로키산맥의 어느 시골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실제로 로키산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트장처럼 꾸며져 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그레이스Grace/니콜 키드먼)’가 마피아에게 쫓기다 도착한다. 그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복장과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피아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라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그녀를 처음 발견한 톰(폴 베타니)은 그녀를 마을로 데리고 와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주자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외부인이었던 그레이스에게 적대감을 갖고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마을 공동체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레이스와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그레이스를 찾는 현상금 수배 전단이 붙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전복된다. 그녀가 현상금이 붙은 ‘죄인’으로 인식되자,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녀를 부당하게 착취하기 시작한다. 일감을 몰아주어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평소에 상냥하게 굴던 마을 남자들은 그녀를 겁탈하기 시작했고, 탈출을 도와줄 거라 믿었던 사람은 배신하고 그녀를 겁탈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누명을 씌워 그녀의 목에 쇠사슬을 감게 만든다.

 

그런데 사실, 그레이스는 어떤 죄를 지어서 현상금 수배가 붙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현상금 수배 전단을 붙인 마피아 집단의 두목의 딸이었다. 아빠와 딸 사이에 있었던 갈등 때문에 마피아 두목인 아빠로부터 도망친 딸을 적극적으로 찾기 위해 아빠는 현상금 수배 전단을 배포한 것이었다. 마피아 아빠는 부하들과 함께 딸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레이스에게 저지른 만행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그레이스에게 못된 만행을 저지른 마을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놓아두고 마피아 두목 아빠와 그의 딸이자 주인공 그레이스 간의 대화와 해결 방식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는 지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라.)

 

까닭 없이,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눈에 보이는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포이에마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Dogville>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선한 일’이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복장과 외모를 하고 있던 그레이스에게 처음에 ‘선’을 베풀었다. 그들은 그레이스를 인격적으로 대했으며, 선하게 대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레이스에 대한 현상금 수배 전단이 붙은 후에 발생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레이스를 ‘죄인’으로 인식한 순간, 그녀를 더 이상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선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레이스에게 각종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다고 하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묻는다.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너는 사람들에게 까닭 없이, 은혜를 베풀 수 있는가?” 죄는 상태방의 부패함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부패함을 드러낸다. 상대방이 죄인(약자)이라고 생각되고 인식되면, 바로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죄인 취급하며,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 우리는 갑자기 그 사람보다 의로운 사람이 된다. 우월한 인간이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유린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갑질을 마구 해댄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은 그것과 사실 정반대의 이야기다. 우리는 죄인을 함부로 정죄할 수 없다. 약자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한다. 견디지 못한다. 죄인을 정죄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그의 생명을 좌지우지해야만 속이 시원하다. 약자에게 갑질을 해야 시원해 한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정말로 부패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는 죄인을 견딜 수 있는가? 우리는 약자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즉, 그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심지어 그를 나보다 귀한 존재로 섬길 수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사실 의로워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 부패한 사람,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상태인데 하나님의 은혜(까닭 없이)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죄인을 보면, 약자를 보면(죄인이라는 말보다, 약자라는 말이 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내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처럼 돌변한다. 내가 마치 그보다 우월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정죄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그를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 약자에게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까닭 없이)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바로 그때 증명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약자를 우리와 동등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섬겨 주셨듯이 그들을 오히려 섬겨야 할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포이에마(하나님의 작품)’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 아니겠는가.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운동’을 보면서, 사회적 약자와 배려는 없고 그들에 대한 정죄만 있는 그들의 기독교는 어떤 기독교인가, 좀 답답하고 궁금하다.)

 

우리는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죄와 은혜와 구원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무엇보다 “까닭 없음(은혜)”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에 까닭 없이 닥치는 고통(까닭 없이 처해지는 삶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까닭 없이 임하는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살면서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까닭 없이 구원받았으니,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이 죄인이라 할지라도, 더군다나 그 사람이 사회적 약자라면 우리는 온마음을 다해 ‘까닭 없이’ 그들을 섬겨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까닭 없이 받은 구원을 값지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갑자기 의로운 자로 돌변하여 사회적 약자를 정죄하고 착취하는 악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세심하고 깊은 묵상이 수행되지 않으면,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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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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