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교회에 남긴 숙제

 

지난 100년 동안 세계사에서 있었던 일 중 모든 인류에게 동시에 고통을 안겨주었던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2차 세계대전 정도를 손에 꼽을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이번 바이러스 팬데믹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 겪는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 인구의 3분의 1을 거둔 흑사병 같은 경우도 유럽에서만 발생한 국지적인 바이러스 피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은 명실공히 전세계를 휩쓴, 말 그대로 ‘팬데믹’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대 유행 감염병입니다.

 

근대에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신체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의학이 발전되고, 의학의 발전은 인간 신체에 대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셸 푸코나 조르조 아감벤 같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생명정치(biopolitics)’라 부릅니다. 인간의 신체가 지배의 영역에 놓이게 된 것이죠. 즉, 우리의 신체는 지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그 사실이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났죠. 팬데믹 동안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정부의 통제에 따라 일정 기간 꼼짝없이 감금당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두 공중보건이나 사회적 안전의 이름 하에 시행되는 일들입니다. 여기에 저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탈리아인들은 전염을 피하려고 평범한 일상, 사회관계와 직장, 심지어 우정과 사랑, 혹은 종교적∙정치적 신념까지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삶, 그리고 삶을 잃는 두려움은 인류를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눈을 멀게 하고 분리하게 한다”(조르조 아감벤, <얼굴 없는 인간> 46쪽).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교회에 남긴 숙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아감벤이 팬데믹 사태를 고찰한 이 책을 세 번 정도 정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성육신, 또는 성만찬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성만찬을 통해서 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육신은 현장성, 그리고 현재성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이 성육신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한 덩어리의 떡을 떼어서 서로 나누어 먹고, 한 주전자의 포도주를 서로 나누어 마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이 교회에 안겨준 가장 큰 시련은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를 멈추어 세웠다는 것입니다. 팬데믹은 교회로부터 현장성을 빼앗아 갔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일을 제거했습니다. 예배는 결코 ‘설교를 듣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데, 가뜩이나 예배가 ‘설교 듣는 일’로 축소된 한국 개신교 상황에서 예배가 더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현장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교회의 예배는 인터넷을 통한 일방적인 소통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서로 접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장성과 현재성의 부재가 길어지면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는 와해되기 십상입니다.

 

현장성이 결여된 인터넷 예배는 편리성과 안도감을 제공해 주지만, 이는 초대교회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배격했던 영지주의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세워가려 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육신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신학을 가현설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정말로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 육신을 입은 것처럼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육신을 입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도 육신의 죽임이 아니라 육신이 죽은 척했을 뿐 예수의 영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주장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의 토대 위에 기독교 신앙을 끼워 맞추려 했을 뿐, 기독교가 가진 성육신 신앙의 깊이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영지주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물질에 갇힌 영을 원래 있던 하늘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기에, 악한 물질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악한 물질세계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온갖 악한 일들은 사악한 물질세계에 대한 심판일 뿐, 그것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던 것이죠. 그들에게 구원은 영지(어떤 깨달음)를 통해 영이 육신을 탈출하는 것이니까요.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책 <얼굴 없는 인간>에서 정말 중요한 말을 합니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장소다. 인간은 단순히 짐승의 주둥이나 사물의 앞면이 아닌 얼굴을 갖는다. 얼굴은 가장 개방성이 있는 장소다. 얼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눈다. 이것이 얼굴이 정치적 장소인 이유다. 지금의 비정치적 시대는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더는 얼굴이 없어야 하고, 숫자와 수치만 있어야 한다. 독재자도 얼굴이 없다”(138쪽). 팬데믹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최고의 도전은 ‘얼굴 없는 인간’의 도래라는 것입니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현장성과 현재성이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볼 때만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얼굴이 정치적 장소라는 뜻은 얼굴을 맞댄 인간들의 사귐만이 세상을 바꿀 힘을 잉태한다는 것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들의 만남은 정치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아감벤에게 정치는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얼굴 없는 인간은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가해진 공포심,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심입니다. 그 공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는 듯합니다. 그 공포로 인해 우리는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듯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 볼 수 없는 틈을 타서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교회 떠나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팬데믹이 가져다 준 풍경, 얼굴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니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교회를 지키는 사람도 서로를 간섭하지 못합니다(또는 사랑으로 보듬지 못합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팬데믹이 교회에 남긴 숙제는 단순히 ‘어떻게 교회 성장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교회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그 교회가 ‘얼굴 없는 사람’의 모임일 뿐이라면, 결국 교회는 아무런 정치적 힘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교회의 규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그 구성원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인간과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더라도, 주님은 그곳에 계시고, 두 세 사람이라도 얼굴과 얼굴을 진실하게 맞대어 세상을 바꾸는 힘을 모을 때,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움을 내려놓고, 얼굴을 보여주세요. 얼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얼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우리 함께 세상을 바꾸어 갑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