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 18. 06:12

2011 1 1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9:1-7, 요한복음 1 29-30, 35-42

제목: 택함 받은 자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본문은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 할 때,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나는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를 종이라고 고백할 때, 거기에는 겸손함이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 우선 종에 대한 잘못된 생각 중 하나가 종은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의 종은 마음 속에 한이 쌓입니다. 신분제도가 있었을 때에 종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양반 쌍놈 구분해서, 양반은 주인으로 군림했고 쌍놈은 종으로 지배 받았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런 세상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인간 세상과 같은 신분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분의 관계와 신앙 고백의 관계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신분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 사이에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지만, 신앙 고백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 사이에는 무한한 자유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 대하여 이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대로 부리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측면에서 우리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면, 우리는 그 고백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거기에 종속된 종으로 전락하면 자유를 박탈 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종으로 속한 사람, 하나님을 향해 자기 자신을 종으로 낮추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세상이 다른 이유고, 우리가 세상의 다른 무엇에게는 종으로 메이면 안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종으로 메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종이 신앙 고백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부르시고 기억하셨다고 말입니다. 우연히, 즉흥적으로 자기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계획 가운데 불렀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은 그냥 아무렇게나 길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이 그의 삶 전체 가운데 미칩니다.

 

종은 계속해서 고백합니다. 자신의 인생은 돌 굴러 가듯이 막 굴러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 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일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연단하신다는 겁니다. 자신의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셨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화살통에 감추셨다고 합니다. 왜 감추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때에 정확하게 쓰시기 위해서 아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실 때 이 말은 우리 인간 세상에 있는 그런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인간 세상의 종은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그냥 소모되고 마는, 그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 그야말로 잡초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섭니다. 세상의 종과, 하나님의 종이 어떻게 다른 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4절에서 갑자기 종이 한탄합니다. 현재 자신의 주변여건상황을 살펴보니 모든 게 갑자기 부질 없어 보이고 허무해 보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질 없어 보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이 개입이 되어 있습니다. 아주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고민이고 번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하나님의 종으로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무너져 버렸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러한 역할을 한 사건이 바로,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바벨론 포로 사건은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되돌아 보게 하는 가장 뼈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민인 우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에게 이렇게도 무참하게 짓밟히고 포로로 잡혀 왔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런 순간이 없으셨습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자기 자신을 절실하게 돌아보는 순간이 없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단순히 인생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분명 자신들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하고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삶에는 이상하게도 우리가 뜻하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고, 내가 하나님 믿고 있는 사람이고, 내가 예수님 믿는 그리스도인인데, 왜 이런 일들이 이렇게 나에게 일어나는 건가?” 그러면서 이런 생각 들죠. “교회는 다녀서 뭐하나.. 예수는 믿어서 뭐하나.. 교회 다니면서 봉사한답시고 헌금도 하고 친교 하느라 힘들고 교회의 일 여러 가지 고생했는데.. 이게 뭔가..”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드는 시험거리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벨론 포로 사건을 통해서 이러한 시험에, 처절한 시험에 들었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자신들의 identity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구약성경입니다. 그 중에서 작은 한 부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처절한 질문 가운데서 그들이 내린 결론이 5절과 6절에 함축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그들은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5절 후반에 핵심적인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사실 현실은 비참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개처럼 끌려가서 포로생활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살던 고향은 이미 파괴되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도 이 종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영화롭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운 고백이지만, 신앙의 깊이가 우리와는 다른 엄청난 고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종이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5절에 나옵니다. 그가 그렇게 고백한 이유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과 자기에게 주어지 사명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 뜻과 사명이 6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 우리는 이 지점에서 복음서의 말씀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오늘 이사야서에서 벌어진 일들을 예수님에게 적용시켜 보십시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 즉 택함 받은 자입니다. 메시아 입니다. 그분은 30년 동안이나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상을 두루 다니며 입에서 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쏟아 내셨습니다. 입이 날카로운 칼 같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무슨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영광은 무슨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그의 삶 내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다니셨는데 영광은 무슨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그는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임 당했습니다.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49 4절에서의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런 고백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고백과 함께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49 5절의 마지막 부분과 상황이 같습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주 받아 죽은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이방의 빛으로 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에 이르게 하신 것처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고, 그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 번째로 안드레를 부르시고, 두 번째로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그렇게, 바로 여기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있는 우리 각자 각자를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다.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돌 굴러 가듯이 막 굴러 가는 인생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이 날카로운 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독설을 내뿜는 입이 아니라, 에베소서 6 17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내뿜는 거룩한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갈고 닦은 화살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탄 마귀를 심장을 꿰뚫어 버리는 날카로운 화살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받은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이 사명이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보이면, 포로로 잡혀가고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합니다.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것처럼 죽어갔을지라도, 영광 중에 부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듣기 좋으시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고 실재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실재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구나!”는 의심이 드십니까? 감당하기 힘든 일 가운데 신음하고 계십니까? 그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택함 받는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자,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 주십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부활의 역사가 꼭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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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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