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7. 06:59

특별한 부르심

(마가복음 3:7-19)


3 7-12절은 116절에서 35절까지의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요약하고 있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 갈릴리 전기 사역을 요약하고 앞으로 있을 갈릴리 후기 사역을 전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기 사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유대 전역에서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귀신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

 

왜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는가? ‘경고하다(에피티마오)’는 경고나 꾸짖음과 같은 강한 의미의 동사이다. 이는 마가복음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메시아의 비밀의 주제를 담고 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감춰져 있다. 사실 아직까지 감춰져 있다. 예수의 메시아성(메시아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도 사람들이 안 믿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갈리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메시아성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메시아되심(메시아성)이 온 세상에 완전히 드러날 날이 온다. 그날을 종말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종말은 단순히 세상의 끝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성이 완전히 드러나는 날을 말한다.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섬기는 이들에게는 복이 있다. 우리는 정말로 특별한 사람들이고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 열 둘을 세우신다. 이것은 제자들을 선발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부르셨다. 이것은 갈릴리 후기 사역을 위한 준비였다.

 

사역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교회에는 헌신된 사역자가 꼭 세워져야 한다. 교회 다니면서 마음 속에 품어야 하는 것은 헌신된 사역자로 세워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이어서 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이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교회 다니면서 교회 사역을 안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스스로 구원에서 멀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사역자는 단순히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자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이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인격이란 지속적인 자아를 가리킨다. 심신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자아가 아니라, 심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를 인격이라고 한다. ‘사역하는 일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의 인격과 사역(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담아내고 있는지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

 

KBS 2TV '제보자들'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 앞에서 시위하는 한 남성의 사연이 소개됐다. 이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교회 목사가 불륜을 저질렀다며 아들의 유전자 감식을 병원에 의뢰했다. 그리고 감식 결과, 99.99%의 확률로 목사의 아들임이 밝혀져 충격을 줬다. 그런데 아내는 "결과가 그렇게 나왔어도 아들이 하나님의 자식인 것은 때려죽여도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목사는 "(그 여성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기도해달라고 해서 기도를 했다" "기도한 것 외에는 없다, 불륜 관계는 아니었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면서 그 목사는 그 아이는 기도해서 생긴 아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것을 보고, 이들의 인격과 사역이 그리스도를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벗어난 일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들이다. 사도행전 1장부터 4장까지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아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재현했는 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되니까,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고, 한 마음이 되고,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가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드러낸 일과 정 반대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재산이 아까워서 얼마간 감추어 두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일이 소개되고 있다. 사도행전은 이 일을 베드로의 입을 빌려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것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다!”(5:3-4).

 

성령이 마음에 내주하시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우리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사탄에게 이 마음을 빼앗기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사탄에 의해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자취를 감추고, 나를 죽이고 공동체를 죽이는 일로 돌변하고 만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특별히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위임하신다. 이 위임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부여된 위임이다. 모든 교회는 이것을 위해 한 마음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을 하고 있지 않는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고, 이것을 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열 둘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위임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데,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 부르신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주님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주님과 동행하는 자를 통해서 일어난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자가 에녹과 노아이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세상을 떠나더라도, 하나님이 데려간 사람이 되어야지, 누가 데려갔는지 모르면 안 된다.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는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더니,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라. 오늘 내가 죽는다면, 내 죽음은 그냥 개죽음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데려가신 죽음인가?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6장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시고 세상을 구원할 방도를 알려 주신다.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덕분에 세상은 홍수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나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자.

 

예수님이 우리(제자)를 부르시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한다. ‘복음(유앙겔리온)’은 예수님의 왕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수반한다. 복음 전하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가진다. 이게 중요하다. 복음 전하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위에서 보았던 제보자들의 방송을 통해서 보는 저들의 모습은 귀신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신을 불러들이고 있다. 음란 귀신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들은 음란 귀신을 오히려 불러들여 처참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면, 탐욕 귀신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탐욕 귀신을 불러드린다.

 

여러분을 죄악으로 옭아매는 귀신을 내어 쫓으라!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갖는 권세이다.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귀신을 불러들여 죄악에 얽매인 자가 어떻게, 무슨 힘으로 복음을 세상에 나가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전하겠는가? 이런 말이나 듣지 않겠는가! “너나 잘하세요!”

 

우리는 예수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일컬어 붙여준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1장의 안디옥에서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가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5-26).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1)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2)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우리를 죄악에 얽매이게 하는 귀신을 내쫓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부르심에 우리는 잘 응답하며 살고 있는가.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답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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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