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1. 6. 03:06

[시론] – 허수경의 시라일락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허수경의 시 '라일락' 부분, 시집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수록)


라일락의 향기는 중독성이 짙다. 봄이 오는 길목을 가득 채우는 라일락의 향기는 웃음기 없는 사람의 마음도 활짝 열리게 한다. 내 어린 시절을 온통 물들인 것은, 봄의 라일락 향기와 가을의 국화 향기다. 봄의 향기와 가을의 향기는 그 결이 다르다. 봄의 향기는 이제 시작되는 인생의 환희가 묻어 있고, 가을의 향기는 이제 저물어 가는 인생의 애환이 묻어 있다.


교회 앞 공터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그 향기를 발하던 라일락, 그래서 봄이 오는 것을 몹시도 그리워하게 만들었던 라일락, 그 나무. 나는 그 라일락 나무가 무참히 뽑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있던 그날을 기억한다. 라일락 나무는 쓰러져 있으면서도 향기를 뿜었다. 마치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온통날 속인 바람의 향연인지 모르겠다. 행복을 찾아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인생의덧없음’, 정말 바람 맞은 기분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마냥 허무로만 채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날 속인 바람을 향해한 방 멋지게 복수하려면, 우리는 그날의 라일락 나무처럼,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밖에 없다.


푸쉬킨은 말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그의 말은 거짓이다. 그러나 참이다. 삶은 우리를 바람처럼 속인다. 그렇다고 슬퍼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참고 견딜 수만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밖에 없다.


허수경은 그녀의 다른 시 연필 한 자루에서 이렇게 말한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이 시는 자연스럽게 윤동시의 시 십자가를 연상케 한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예수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내뱉을 때, 하늘은 어두워가고, 몸은 축 늘어져갔지만, 그의 영혼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생동감이 넘쳤을 것이다. 그의 육체는 십자가 위에서 몰락하는 듯 보였으나, 그의 생명은 신나게 웃고 있었을 것이다.


몰락은 피할 수 없다. 원래 이 세상이 몰락을 부추기는 세상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슬픔을 보이며 몰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너무도 소중하고, 너무도 신비롭고,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몰락할 것을 알지만, 몰락해가지만, 몰락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신나게 웃을 수 있다. 아무것도 나의 웃을 수 있는 자유를 빼앗을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우리,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자.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