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1. 12. 15:14

[시론] 허수경의 시 수박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ㅡ 허수경의 시 '수박'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로 시작하는 이 시는 둥글지 못해 겪었던 사랑의 상처에 대하여 말한다. 이제는 둥글어졌기에 이런 아픔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도 그렇다. 둥글지 못할 때,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불행한 일들'에 대하여 날을 세워 존재를 비관하고, 신에게 삿대질을 해대는 날이 있다. 그렇게 살았던 인물이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가 그랬다. 미카엘은 힘들고 어려운 젊은 날을 보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던 어느 날, 그는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하나님을 저주했다. 그런데 그 이후 그의 삶은 생각과는 달리 풍요로워졌다. 하나님을 저주했으니, 죽거나 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부자가 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떠났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평생 이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죄책감은 아버지의 예언’(그는 자신의 자식들 모두가 저주를 받아 33살을 못 넘길 거라고 생각했다.)보다 오래 살아남은 자식, 쇠렌 키에르케고르에게 유전됐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저주스런 과거를 알게 된다. 하나님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사건 외에도, 아버지가 하녀로 일하던 여성과 혼외정사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고, 그 하녀는 본부인이 죽기 전에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바로 자신(쇠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 쇠렌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이 가진 죄책감과 평생 싸우게 되는데, 그 죄책감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던 연인 레기네 올젠과의 약혼도 파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부여받았다고 믿는 영적이고 실존적 자산을 통해서 제도화되고 굳어져가는 국가 교회 체제(Christendom)에 맞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길고도 험한 철학적, 신학적 여정에 나선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존재 자체가 둥그러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러면 위의 싯구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있는 겸손한 존재가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그 치열한 여정의 한 복판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천재가 아니다. 그들은 항상 넘쳐났다.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순교자, 즉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그 자신이 먼저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각성이다. 그러므로 미구에 나의 글뿐만 아니라 나의 전 생애까지도, 기계의 흥미를 자아내는 모든 신비로서 연구되고 또 연구될 것이다. 나는 신이 나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결코 잊지 않으며,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바람은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일기, 18471120).


신의 존재는 언제나 저만치 가 있는 마음같다. 그러나 마음이 둥글어지면 왜 신은 저만치 가 있는 마음일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된다. 둥글지 못했을 때, 신이 이만치 가까이 다가왔다면, 아마 우리의 존재는 멸망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여정은 이것을 깨닫는 여정이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주님, 저 만치 가 있는 당신의 마음을 사모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