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1. 8. 03:52

[시론] 허수경의 시 '연필 한 자루'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허수경의 시 '연필 한 자루'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강렬하다. 연필이 무엇인가를 쓰면서 짧아지듯, 우리의 인생도 닳아간다. 짧아진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곧 종말이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짧아지면서 남기는 생의 열매들이 지닌 잠재력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인생은 짧아진다. 매순간 목숨의 한 순간을 어딘가에 내밀기 때문이다. 목숨의 한 순간을 내밀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 변을 보는 일도 목숨의 한 수간을 내밀어야 가능하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밀기 때문에 짧아진다는 거, 짧아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목숨을 떠밀리듯 내밀어야 한다는 거, 허무하다고 생각하기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해야 맞다. 다만, 내밀 수 밖에 없는 한 순간의 목숨이 무엇을 향해 있는 가가 중요하다.

 

시인의 표현은 대단히 강렬한 영성이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가슴 시리도록 강력하게 다가오는 고백이다.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윤동주의 고백이 오버랩 된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이유는 정치도 박애도 깨달음도 아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민다. 짧아지면서 내민 목숨의 한 순간이 당신을 위한 거라면, 연필 같이 닳아서 없어질 우리의 '모든' 목숨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