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14. 10:04

Doing에서 Being

(데살로니가전서 5:16-24)

 

팬데믹은 현대인들에게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대림절 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만 적용해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함께 모여 촛불을 켜지 못하고 있다. 일상이었으면, 우리는 모여 세 번째 촛불을 켜며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촛불을 켤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가 마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깥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마음은 그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고유영역이기 때문이다.

 

올랜도 블룸이 주연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보면,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살라딘 군대에게 빼앗긴 후, 주인공은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했던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Your kingdom is here(머리), and here(심장). That kingdom can never be surrendered.” 팬데믹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록 지금 함께 모여 촛불을 켜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에 촛불을 켜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대림절 세 번째 촛불은 기쁨(Joy)이다.

 

기쁨의 촛불을 켜고, 우리는 기쁨을 이야기한다. “항상 기뻐하라!” 성서정과(Lectionary)에서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바울서신과 함께 보게 끔 되어 있는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보아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61:10).

 

데살로니가전서와 이사야서에서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서신 중 가장 빠른 시기에 기록된 서신서이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은 굉장히 래디컬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말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고 살았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의 기반은 매우 연약했다. 핍박이 심했지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어떠한 법적 장치나 체계적인 조직도 없었다. 이들에게야말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보이게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그들의 마음에 있었을 뿐이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지금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다고 말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이사야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기쁨을 입에 담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힘들고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이 세 가지도 중요하지만,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라는 이 수식어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기뻐하고, 가끔 기도하고, 가끔 감사한다. 웃을 일이 없어 시체가 되어 간다. 기도는 가장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감사보다 짜증나는 일이 더 많다. 우리의 현실이 이렇다 보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을 들으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어, 우리 마음에 죄책감만 늘어간다.

 

19-21절은 번역상 오류가 있어 언급이 필요한 구절이다. 그 네 구절을 보면, 네 가지의 행위를 말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는 한 가지의 아이디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으로의 회귀이다. 헤세드, 즉 언약적 사랑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이 예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맥락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말씀의 번역이 문제인데, 그리스어 원문에는 ‘but’의 접속사가 붙어 있다. 그것을 집어넣어 다시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그러나(but), 범사에 헤아려(그 예언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 그러나 주의 말씀이라고 선언되는 것이 모두 옳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그 예언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 지 분별하여서 좋은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라.’

 

쉽게 말해서, 교회 간판 걸어놓고 거기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말씀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니, 잘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게 참 쉬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 이런 광고까지 본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 받는다. 부부갈등. 의처증. 의부증. 동성애. 뇌질환. 중풍병, 간질병. 정신분열. 우울증. 자폐. 치매. 고혈압. 당뇨병. 각종통증. 마음의 병. 남성 발기부전. 여성 오르가즘. 신종 코로나.” 이런 광고가 교회의 이름으로 버젓이 광고되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가 어두울수록, 사는 게 힘든 때일수록 이러한 거짓 예언악한 예언들이 판을 치는 법이다. 사람은 일단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접한 최초의 정보를 옳은 것이라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특별히 미디어를 통해서 자주 접한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크다. 잘못된 정보가 머리 속에 일단 들어가면, 그것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 일은 쉽지 않다. 요즘 참 어려운 시대인 게, 옛날에는 정보를 접하기 어려워서 어떤 이슈에 대하여 잘못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잘못된 정보에 너무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이것 때문에 아주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공부를 통해서 배웠지만, 바울이 사역을 하면서 가장 심하게 다투었던 교리적 논쟁이 무엇인가? 행위(율법)냐 복음이냐의 문제였다. 이 논쟁은 본문에 적용해서 풀어보면 이런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을 율법(행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래 주님이 항상 기뻐하라고 했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어라고 생각하며, 기쁘지도 않는데, 기뻐하는 척하고, 기도하지도 않는데, 기도하는 척하고, 감사하지도 않는데, 감사하는 척할 것이다.

 

실제로, 한얼산 기도원에 가면(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예배드리는 내내, 찬양하는 내내, 탬버린을 들고 빙빙돌면서 춤추시는 분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와 저분은 뭐가 그리 기쁘셔서 저렇게 쉬지 않고 춤을 추시냐, 참 휼륭하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개 우리는 그 분을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 때문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 순례를 떠난 사람도 있었다. 오래전 오강남 박사가 편역해서 옮긴 <예수의 기도>라는 책이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한 청년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지?’의 의문을 품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순례를 떠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예수의 기도>라는 책이다.

 

그 책에서 가르쳐 주는 기도는 매우 간단하다. “주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Jesus, Have mercy on me)”를 계속하여 외우는 것이다. 나도 참 좋아하는 기도라, 자주 이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그것을 해보면, 우리가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떤 목사는 ‘24시간 예수 바라보기운동을 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하다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핍박 가운데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있었을까?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았다.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지 못한다. 근대의 자본주의는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땅따먹기 게임이다. 누가 시장을 넓게 확보하느냐가 성패의 기준이 된다. 여기서 시간은 땅따먹기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도 자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간은 온갖 행위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기 힘들어 한다.

 

교회도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교회가 땅따먹기 게임을 한다. 교회건물을 크게 짓고, 교인들을 많이 모으고, 선교지를 넓혀간다. 교회 건물이 크고,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선교하는 지역이 많은 교회를 성공한 교회, 그러한 곳에서 목회하는 사람을 성공한 목회자라고 말한다. 땅따먹기를 잘하기 위하여, 그들은 더 많이 예배드리고, 더 많이 모임을 갖고, 더 많이 선교를 한다. 사회 곳곳에, 지구 곳곳에 자기 교회의 깃발을 많이 꽂는 교회가 성공한 교회라는 인식을 한다.

 

사실, 데살로니가의 본문은 그러한 생각에 강력하게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예언(주의 말씀)’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며, 그것을 잘 분별하여 선한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라는 이 말씀, 이것은 매우 강력한 브레이크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예배도 드리지 말고, 모이지도 말고, 선교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럴리가. 다만,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졌던, 포로기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시간을 다르게 보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춘향전 이야기를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춘향이는 이도령이 떠나자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변사또의 횡포에 춘향이는 결국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춘향이가 이도령도 떠나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가장 연약할 때에 그녀가 붙잡은 것이 무엇인가? 이도령과의 약속이다. 그런데, 그 약속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했을 때, 춘향이가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래 내가 온힘을 다해서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면 이도령이 이 마음을 알아주고, 나를 구하러 와 줄거야.’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의 행위가 이도령의 구원을 가져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춘향이의 삶에는 이미 약속을 통하여 이도령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포로생활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그들이 가장 연약한 때이다. 연약하니까, 한 가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래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야!’ 아니다. 그들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서, 범사에 감사하니까, 그러한 행위(doing)를 하니까 주님이 오시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주님이 와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선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뭔가의 행위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 이미 구원된 시간으로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being)’가 되는 그리스도인은 행위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지 않고, 존재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한다. 기뻐하는 행위, 기도하는 행위, 감사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의 존재, 기도의 존재, 감사의 존재가 된다. 이러한 존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시즌,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사줄까(행위) 고민하지만, 우리가 정말 구원된 시간을 산다면, 어떤 선물을 사줄까를 고민하기 보다, 자기 자신이 선물이 될 것이다 (Buy a present à be a present). 성탄절, 곳곳에서 빛나는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light)를 바라보는(행위) 사람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나는 불빛이 될 것이다(Seeing the Christmas lights à Being the Christmas lights).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성탄절이 되었으니, 동방박사들처럼 주님 앞에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가지고 나오길 바라실까? 아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미 구원된 시간 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배를 드리는 행위(doing)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 (being)예배 자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번 성탄절에 한 가지만 실천해 보자. 소중한 사람에게 뭔가를 사주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그 사람에게 선물이 되어보자. Doing을 통해서 소중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Being을 통해서 소중한 사람을 기쁘게 해보자. 이것이 가능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요, 그렇지 못한 자는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기까지 한참 모자른 자이니, 주님의 은혜를 더욱더 간구하자.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어, 기쁨이 넘치는 성탄절 절기를 보내기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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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