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26. 05:28

고통 소리 내기 (groaning)

출애굽기 2:11-25

 

1. 요즘 전염병의 난 때문에 혼란하고 싱숭생숭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종교계에서는 우리 시대를 보듬고 안아주었던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가톨릭 신부였지만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종교 평화 운동에 앞장서 오신 한스 큉 교수가 얼마전 돌아가신 데 이어,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절실하게 외치며 기독교의 교리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하셨던 성공회의 존 쉘비 스퐁 주교가 소천하신 데 이어, 불교의 대중화와 종교 평화 운동(세계 평화 운동)에 큰 기여를 하신 틱낫한 스님이 입적했다. 모두 90세 이상 사시며 장수하셨다. 종교계의 스승들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머물다 가셨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2. 위대한 종교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의 위대한 종교인들은 사람에게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주로 귀를 기울였다면, 산업화 이후의 위대한 종교인들은 사람과 그리고 더불어 자연에게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이고 동물이고 자연(식물)이고 할 것 없이 고통 가운데 있다는 증거이다. 문제는 모든 생명체가 내고 있는 이 고통 소리를 우리가 듣고 있는가, 아닌가에 있을 뿐이다.

 

3. 본문의 이야기는 장성한 이후의 모세에게 발생한 일을 들려주고 있다. 모세는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인 동시에 종교 지도자였다. 위대한 종교인들이 고통 소리에 귀 기울였듯이, 모세에게도 위대한 (민족)종교 지도자의 자질이 보인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11절).

 

4. 장성한 모세가 세상에 나가서 본 것은 ‘고되게 노동하는 자기 형제들’이었다. 사실 왕궁에서 자란 모세가 세상에 나가서 ‘고된 노동’을 보았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왕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귀족의 화려한 생활이나 사치, 또는 질서가 잘 잡힌 계급사회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흡족해 하며 자신의 왕궁 생활에 도취되어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이나 폭력 등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모세의 눈에는 ‘고된 노동’과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고통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5. 모세의 고통 소리 듣기는 이집트에서만 발생한 일이 아니다. 그가 고통 소리를 들은 일 때문에 정의를 행하다 오히려 살인자로 몰려 이집트를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그는 미디안의 우물가에서 들려온 고통 소리를 듣는다. 광야에서 우물은 생명줄이다. 미디안 광야의 한 우물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그곳에서 발생한 다툼에 끼어든다. 힘센 남자 목동들이 힘없는 여자 목동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약자의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었다.

 

6. 민수기에서 보는 모세의 모습처럼 성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는, 성장한 이후의 모세의 모습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그가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고통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성숙한 모습을 모이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우선 중요한 것은 고통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으냐, 고통 당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일단 고통 소리가 귀에 들려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7. 그런데 본문에 보면, 고통 소리 듣기’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고통 소리 내기’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영웅적 탄생 이야기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에서의 하나님과의 신비한 조우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영웅적 이야기를 듣고 너무도 빨리 그 영웅이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로 곧바로 달려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멈추어서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이야기는 장성한 모세가 고통 소리를 들은 것 때문에 발생한 고통스러운 이야기이다. 이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뿐 아니라 신앙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너무도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8. 여러 가지로 고통스러운 팬데믹 시대를 보내면서 이 고통을 이겨보려고 나름 몸부림치면서 읽은 책 중에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저서 <고통 없는 사회>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좋은 안목을 선물해 주었다.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진통사회’, 즉 고통 없는 사회로 명명한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사는 시대,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고통을 싫어하는 사회, 고통을 없애려는 사회, 마치 우리 눈앞에 있는 고통을 없는 것처럼 여기려는 사회라는 것이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된, 진통제의 남발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9.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그토록 고통(통증)을 마치 없는 것처럼 없애려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한병철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진통사회와 성과사회는 서로 조응한다. 고통은 약함의 신호로 해석된다. 고통은 숨기거나 최적화를 통해 제거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고통은 성과와 병립할 수 없다. 고통의 수동성은 능력에 의해 지배되는 능동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오늘날 고통은 모든 표현 가능성을 빼앗긴다. 고통은 침묵을 선고받는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격정(passion)으로 활성화하고 언어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2쪽).

 

10. 이것은 이 땅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이 자취를 감춘 원인이기도 하다. 코미디는 ‘풍자’를 매개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장르이다. 대개 코미디에서 풍자되는 것은 정치이다. 정치풍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통을 코미디로 승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에서의 고통을 더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래서 코미디는 민중의 저항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 이상 고통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병철 교수가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진통사회는 “고통을 격정으로 활성화하고 언어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통사회에서는 코미디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1. 그러면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전 분야에서 예능만 넘쳐날 뿐이다. 고통을 없애는 일, 진통, 즉, 위로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코미디와 예능이 다른 점은 코미디는 위에서 말한대로 우리의 감추어진 고통을 풍자의 방식을 통해 드러내 놓지만, 예능은 반대로 우리의 드러난 고통을 위로의 방식을 통해 감추어 버린다. 그래서 지금 모든 방송은 예능화되었고,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예능인이 되어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위로의 방식으로 감추느라 여념이 없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자들이 예능의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예능화가 얼마나 깊고 넓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2. 우리는 행복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상은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을 말하지 않으면 ‘루저’로 낙인 찍힐까 봐, 사람들은 ‘난 행복해’를 자기 최면 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를 자기 최면의 도구로 활용한다. SNS에 불행한 모습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 모두 ‘행복한 모습’만 올린다. SNS는 마치 누가 더 행복하게 사는지 뽐내는 공간 같다. 사람들은 그곳에 올라온 타인의 행복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고 조작된 행복을 올리기도 한다.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런 고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13.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고통 소리를 듣기 쉽지 않다. 모두 겉으로는 행복한 척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 소리 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시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처럼 고통 소리를 내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보면서 대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대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를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데모할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통을 표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을 표현하면 ‘루저’로 낙인 찍히는 기이한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4. 출애굽기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을 뽑으라면, 2장 23절에서 25절이다. 모세를 죽이려던 애굽 왕이 죽었다는 기사와 더불어, 무엇보다 비로소 ‘하나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헤세드의 하나님, 즉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밑도 끝도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관계 속에 계신 분이시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언약을 지키시고, 그 언약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언약에 따라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우리의 신앙은 밑도 끝도 없는 신앙이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신앙, 즉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신앙(relational faith in God)이다.

 

15. 언약의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했던 일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한 일은 고된 노동이지만, 그 고된 노동을 하면서 ‘고통 소리 내기’를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신앙의 지혜, 또는 삶의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고통 소리를 쉬지 않고 냈다는 것이다. 이게 왜 신앙의 지혜이고 삶의 지혜이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 내기를 통해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고통 소리 내기가 없었으면, 아마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출애굽 하지 못했을 지 모른다.

 

16. 이것은 마치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시각장애인 바디매오의 이야기와 같다.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사역하실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길 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지금 지나가는 분이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시끄러운 소리로 예수를 불러 대는 바디매오를 보고 사람들은 꾸짖었다. “조용해!” (고통 소리 내기를 가로막는 자가 가장 못된 사람) 그런데, 사람들이 심하게 꾸짖을수록 바디매오는 더 큰 목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예수의 은혜를 간구했다. 바디매오는 예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통 소리 내기’를 실행함으로 인하여 잃었던 시력을 되찾고 구원을 받는다.

 

17. 출애굽기를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어야 하는 신앙적 통찰은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라는 선행적 은총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 내기’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고통 소리 내기)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23절).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 내기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나게 하였고, 그 자손들을 돌보게 하였다.

 

18.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의 시간이 줄고 예배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줄고, 또는 교회에서의 예배와 프로그램이 점차 ‘entertainment 예능’화 되어가는 것도 고통을 표출하지 않고 위로를 통해 고통을 없는 것처럼 감추려는 이 시대의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 소리 내기’가 사라지니,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마치 하나님의 역사(구원)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바디매오처럼 ‘고통 소리 내기’를 하는 이가 없으니, 교회는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지루하고 따분한 곳이 되어가는 것 같다.

 

19. 삶에 문제가 있는데 왜 ‘고통 소리 내기’를 하지 않는가. 왜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고, 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가. 왜 목사를 붙잡고 우는 사람이 없고, 왜 아무렇지 않은 듯 웃기만 하고, 왜 위로만을 바라면서 TV예능 같은 것에만 몰두하는가. 고통 소리 내기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신앙인들)이 잃어버린 귀중한 삶(신앙)의 유산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신앙이 더 훌륭하다) 요셉은 임종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전한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여기서 ‘파카드(돌보시고)’라는 동사가 쓰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과 예언이 담긴 말이다.

 

20. 고통 소리 내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통로이다. 진통사회, 고통 없는 사회에서 ‘고통 소리 내기’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은 ‘고통 소리 내기’를 가장 두려워한다. 고통 소리 내기는 고통을 지목하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 소리를 내면 ‘조용히 해’라며 고통 소리 내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고통 소리 내는 것은 ‘루저’나 하는 일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통 소리 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고통 소리 내기는 하나님이 그 고통의 자리로 오시게 하는 축복의 통로요, 그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의 통로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 은총의 통로이다. 우리 함께 다짐해 보자.

 

“나는 고통 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