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 03:42

2011 3 31일 목요찬양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53: 1-12

제목: 구원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가?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살면서 이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구원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가?” 무조건 믿는 신앙을 맹신이라고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수많은 질문들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든 질문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믿음의 조건에는 질문들이 넘쳐나야 합니다.

 

오늘 질문에는 세 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구원, 그리스도, 그리고 고난입니다. 각각의 키워드가 너무도 큰 주제라서 우리의 일생을 다 바쳐도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교만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질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일어나는데,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일생을 바쳐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질문에 답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내기에는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것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그것을 온전히 파악할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깎아 내려서 인간 존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지를 온전히 파악해야만 정확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아는 사람은 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못 본다는 것이죠. 그래서 김연아 같은 피겨스케이팅의 1인자도 자기 자신을 살펴줄 코치가 필요한 겁니다. 코치의 말을 잘 따라서 자신의 문제점을 보안해 나갈 때 더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 갈립니다. 교만은 마음이 완악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눈과 귀를 닫는 것이고, 겸손은 마음이 부드러워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눈과 귀를 열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분노가 표출되고 증오가 표출됩니다. 결국 그 마음이 실제적인 죄를 낳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고 삽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는 것을 내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와 새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 그리스도, 고난의 신비를 다 알고 있는 듯이 신앙생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구원, 그리스도, 고난은 하나님과 관련된 신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종말에 스스로 드러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절대로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 12절에서 이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오늘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고난이라는 주제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이들도 당연하게 고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은 꼭 고난을 당해야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고난 없이 우리이게 구원을 베푸실 수는 없는 건가요?

 

사디스트’, 그리고 메조키스트라는 말을 알고 계시는지요? 정신병적 증상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 ‘사디스트는 상대방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메조키스트는 사디스트와는 반대로 가학적인 행동을 당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용어를 빌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평가해 보면, 메조키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학적인 행동, 즉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견디어 낼 때 오히려 믿음이 큰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정신병적인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고난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당해야만 무슨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 고난이 정당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그런 것 묻지 않고, 그냥 고난의 길로 곧바로 가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겁니까? 이건 죄와 연결이 됩니다. 오늘 말씀 중 5절 말씀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것도 조심해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죄인 만들어서 우리를 죄책감에로 밀어 넣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책감을 지게 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도 기독교 신앙을 심리학적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나쁜 짓입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상을 드러내는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상태를 일컬어 4절 말씀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질고는 질병을 의미합니다. 슬픔은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오는 아픔을 말합니다. 질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지만, 사실 감기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은 허술합니다. 그냥 조금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약간 완화시켜 줄 뿐이지 우리 인간에게 문득 찾아오는 질병의 늪을 완전히 제거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슬픔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 많은 슬픔을 당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자식을 잃었을 때, 또는 부모님을 잃었을 때 우리는 슬픔에 잠깁니다. ? 우리의 힘으로 자식을, 부모님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에 잠기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한계 상황인, 질고(질병)와 슬픔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상황을 대신 지시고 그 한계 상황을 넘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죄 된 세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승하던지, 이 죄 된 세상이 승하던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고난 당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성육신 신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죄 많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불가능 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말씀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십시오. 2절 말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이 땅의 기준에 맞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당장 한국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미국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타락한 마음이 어떻게 우리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하나님 나라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3절 말씀처럼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귀하게 여김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이 죄 된 세상이 그리스도를 고난으로 몰아넣었다는 뜻입니다. 고난이 필수여서 그리스도가 고난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 우리의 죄악이 그리스도를 고난 당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나빠서,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죠.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발생한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긍휼히 여기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허물과 죄악을 담당시키셔서 그것을 지고 십자가에 오르게 하시고, 거기에서 허물과 죄악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생명, 부활을 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약간 고난의 신비가 손에 잡히시는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메조키스트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심리학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도 마시고, 죄책감에 휩싸이지도 마십시오. 고난에 저항하시고, 죄책감에 저항하십시오.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부활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몸을 입은 거룩한 백성이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죄인처럼 비굴하게 살지 말고, 의인으로 당당하게 사십시오.

 

심리적인 수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구원이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도 더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고난의 신비를 심리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넘어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말 할 수 없는 그 은혜에 잠겨 기뻐하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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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