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3. 12:55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고린도후서 3:1-18)

 

1. 나이가 들면 생기는 현상 중 하나는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이다.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통상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 즉 나이가 먹어가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현상과는 아주 대조되는 이야기를 한다. 바울은 대표적으로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공동번역성서).”

 

2. 이뿐만 아니다. 본문의 마지막절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공동번역성서).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통념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즉 나이를 먹어가면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고,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3. 바울이 본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레토릭(수사법/화법) 지식과 두 가지의 구약 지식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레토릭 지식 중 하나는 이미 지난 시간에 배웠다. Self-commendation 레토릭(자기칭찬/자화자찬 화법). 2장 12절에서 17절 사이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문구는 전형적인 ‘self-commendation’ 수사법(화법)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를 품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이러한 진술을 할 때 사용되는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5절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4. 맞는 말이긴 하나, 이것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맥락에서 조금 떨어진 이야기다. 고린도후서 2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과 일행)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화자찬’ 수사법이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화자찬 수사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는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다짜고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전혀 경청하지 않는 태도이다.

 

5. 지금은 ‘바울(Paul)’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도 중의 사도이지만, 그 당시 바울의 사역(ministry)은 많은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특별히 유대인들(또는 그리스도 사건을 유대인의 종교 안에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고린도교회에도 여느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대적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울서신에서는 대개 그러한 사람들을 ‘거짓 교사’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잘못 해석하거나,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왜곡해서 가르치고, 신앙생활의 실천을 율법적으로 전락시키는 일들을 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견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6.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바울은 대적자들과 맞서고 있는 중이다. 어떤 거짓 가르침, 아주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뒤틀어서 그것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 같은 이들에 맞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향기’는 로마의 군사문화의 배경을 가진 용어이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정복 전쟁에서 이기고 다시 부대복귀 할 때,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정복한 나라의 향품을 피우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결기가 묻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것이다.

 

7.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두 번째 레토릭은 ‘칼 와호메르’라고 불리는 수사법이다. 영어로는 ‘from the lesser to the greater’ 용법으로 불리고, 한국어로는 ‘하물며 논리’라고 한다. 이것은 가벼운 차원의 진리(the lesser)를 무거운 차원(the greater)의 진리와 대비시키는 화법인데, 이런 것이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하물며) 주 얼굴 뵈올 때에에야 얼마나 좋을까.” (생각-좋음 -à 대면-더좋음) 이러한 레토릭은 성경 곳곳에 쓰이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 4:10-11)

 

8. 바울은 3장에서 전형적인 ‘하물며 논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다.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구약의 두 이야기를 가져오는데, 그 두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바울의 주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이야기이다. 하나는 예레미야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의 이야기이다.

 

9. 바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바울의 사역의 신빙성(Authenticity)을 공격하며 그에게 자격을 물어왔을 때, 자신은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장(recommendation)을 받을 필요없이, 고린도교회 교우들 자체가 소개장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레미야 31장의 말씀을 근거 삼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입니다.”(3절)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가져다 쓴 예레미야의 본문은 이렇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1, 33).

 

10.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변호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과 연결 짓는데,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일컬어 ‘새 언약의 사역’이라고 하고,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 칭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하면서 자신의 사역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11.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시키는 이유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아직까지도 모세의 사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모세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옛 언약의 사역이고, 바울 자신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라는 주장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12. 바울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6절). 옛 언약은 율법이다. 그것은 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성령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와 성령의 결정적인 차이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문자(율법)과 성령’의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보통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 알려진 <예수를 시험하는 유대인들> 이야기를 볼 것이다.

 

13. 예수와의 극한 대립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항을 들이대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처리를 말한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요 8:4-5). 바로 이 구절에 대한 바울의 코멘트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7절).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처리하면, 그 여인에게는 오직 죽음 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14. 율법의 기능은 매우 분명하다. 사람들을 모두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을 들이 댔을 때, 죄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세는 바로 이러한 일의 심부름 꾼이었다. 그러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들이댄 유대인들과 다른 모습을 취하신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에 있으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냐?”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요 3:10-11).

 

15.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문자)은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왜 ‘새 언약의 사역’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새 언약의 일꾼’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대적자들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 아니라 ‘옛 언약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의 사역을 따르지 말고, 새 언약의 사역을 따르라고! 옛 언약의 일꾼이 되지 말고, 새 언약의 일꾼이 되라고!

 

16. 물론, 바울은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했던 ‘옛 언약의 사역’을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터라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건을 두고,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이유는 그 영광이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문자로 된 율법을 통한 ‘옛 언약의 사역’이 가진 한계였다.

 

17. 바울은 문자로 된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율법, 돌에 새겨진 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법이 더 영광스러운 사역이라는 것을 위에서 말한 ‘칼 와호메르 수사법 / 하물려 논리’를 사용하여 주장한다. “이 문자의 심부름꾼(모세)도 그렇게 영광스러웠다면, 하물며,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문자로 된 율법의 기능/사역)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하물며,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성령의 기능/사역/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18.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사역’을 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모세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직도 모세의 사역을 강요하여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 아래에 가두어 꼼짝 달싹 못하게 하려는 바울의 대적자들,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이자 일침이다. 그렇게 문자로 된 율법에 갇혀 ‘죽음과 정죄’ 안에 가두는 행위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가증스러운 일인 것이다.

 

19.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문자(율법)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였다. 그런데, ‘옛 언약’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주님께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잘 지켜야 한다.

 

20. 바울의 편지가 기독교의 성경(경전/canon)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문자의 법(율법) 아래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또한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죄책감) 아래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성령의 법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18절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라는 것은 죽음의 일, 정죄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일, 자유케 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몸 바쳤듯이, 우리도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의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성경이 되었을 것)

 

21. 이 복음이 전해진지도 벌써 2천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성령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여전히 문자로 된 율법 아래 있는 것을 본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차별하고, 누군가를 억압하며 산다. 또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생명력 있는 삶,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그것으로 인하여 짓눌리면서 산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나이 먹어가면서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자신감을 잃어갈 뿐이다.

 

22. 그런 모습들은 바울이 그토록 경계하던 ‘옛 언약’에 붙들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옮아가지 못한 어린 아이의 믿음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성령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마음에 새긴, 성령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마음에 품고 생명력 넘치게 삶을 살고 하나님 아닌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살 뿐만 아니라(내 마음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고, 나는 지금 무엇에 매어 힘들어하는가 가만히 살펴보자),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지금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저 나 먹고 살려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인가?(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을 하면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과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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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