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14. 14:27

2010 12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야고보서 5:7-10

제목: 기쁨은 인내의 열매다

 

“Are we there yet?” “아직 멀었어요?” 어린 아이들이 차 뒷자석에 앉아서 몸을 비비 꼬며 하는 말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 보려고 노래도 듣고, 책도 읽고, DVD 시청도 해봅니다. 그런데 아직도 달리는 차 안에서 점점 몸을 지쳐가고 더 이상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는 “Are we there yet? 아직 멀었어요?”라는 투덜거림이 튀어나옵니다. 인내를 가지고 조금만 더 참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길 바랄 뿐입니다. 너무 지루하다 보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지루해 보인다는 생각뿐입니다. “.. 지루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기다림일까요?

 

이 동요를 기억하시죠?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서울에 왜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오빠는 서울을 가면서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오겠노라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서울 간 오빠는 언제 돌아올는지 기약도 없고 소식도 없습니다. 오빠를 기다리는 이 소녀의 심정은 어떨까요?

 

이와 비슷하면서도 애절한 마음을 그린 소설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춘향전입니다. 조선시대 신분의 벽을 넘어서 서로 정인이 된 두 사람, 성춘향과 이몽룡. 두 사람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이몽룡은 과거시험을 치르러 한양(서울)에 갑니다. 이도령을 떠나보낸 성춘향! 이도령이 과거급제 해서 다시 돌아와 자신과 혼인할 거라는 걸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도령을 기다리는 성춘향은 마을에 새로 부임한 변 사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합니다. 성춘향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면서까지 저항하고 투옥까지 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성춘향은 굳게 믿었습니다. 이도령이 돌아올 거라고. 그러나 성춘향의 마음 속에는 점점 한이 서려갔습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수모를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위의 동요에서 등장하는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도, 성춘향도 누군가를 인내 가운데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 속에는 한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야고보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메시지입니다. 인내하라, 기다리라 합니다. 표면 상으로는 “Are we there yet?”의 기다림과 뜸북새 그리고 성춘향의 기다림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릴 때 지루해서 온 몸을 빌빌 꼬면서, 그리고 이 마음에 한을 품고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모티브는 농사일입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그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가나안 땅에서의 농사 문화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굉장히 척박한 땅입니다. 땅이 척박하다는 것은 물 구경하기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아무리 비옥해 보이는 땅도 물이 없으면 쓸모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는 대개 강물이 흐르는 곳을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짓기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요단강이 흐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 땅의 지형입니다. 요단강은 해발 -200미터 정도 지역을 흐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계곡을 흐르는 물입니다.

 

요즘에야 한일 자동펌프같은 것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다 쓰면 되지만, 고대 사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저 200미터 밑에서 흐르는 물을 퍼다가 농사짓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농사 지을 때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물의 원천은 빗물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 땅에는 비가 잘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타이밍입니다. 비가 제때 와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내리는 비, 그곳도 농사가 잘 되기 위해서 제때 와주어야 하는 비, 그 비가 바로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가나안 땅는 11-3월은 비가 오고, 5-9월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10,11월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하고, 3,4월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를 합니다. 파종과 수확에 있어서 이 비는 생명과도 같은 비입니다.

 

비가 내리느냐 안 내리는냐에 따라서 농사의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제때 잘 와줘야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는 생명줄과도 같았고 비를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었으니, “이른 비와 늦은 비신앙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농부는 땅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씨앗이 자라나 맺게 될 열매를 상상합니다. 이미 농부는 그 씨앗의 열매를 보면서 씨앗을 뿌립니다. 그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다림입니까? 그 비가 안 오면,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비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씨앗에서 이미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지만 그 마음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실 거라는 확신입니다. 비를 내려 주셔서 씨를 뿌리면서 보았던 열매를 거두게 하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야보고서 기자는 지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기다림이 어떠한 기다림인지 분명하게 깨달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이고 있는 인내, 기다림에 대한 용어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한 용어입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이 단어를 쓸 때 어떠한 뜻으로 썼는지 원어를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헬라어 원어를 인내, 기다림 정도로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에서 이 단어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줄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Spirited”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에너지가 가득한 상태, 결의, 결심, 또는 용기가 가득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위에서 “Are we there yet?”이나 뜸북새, 춘향전에서 살펴보았던 인내, 기다림과는 성격이 다른 인내,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의 인내, 기다림은 지루함이 가득한, 한이 서린 그러한 인내고 기다림이었지만, 야고보서 기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인내, 기다리는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에너지가 넘치고, 결의, 용기가 가득한 인내,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어 단어에서는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로 “Generosity, Magnanimity”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관대함, 기꺼움정도로 번역하죠.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대한 인내, 기다림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 기자는 이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겁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그 씨앗 속에 있는 열매는 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거나, 현재의 관점에서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나 현재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곳에 임했습니다.

 

이게 보이십니까? 이게 보여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씨앗에서 열매를 보지 못한다면 그 수고가 헛되고 고단하게 됩니다. 지루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열매가 맺어질 지 알 수도 없는 씨앗을 무슨 이유로 뿌립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뿌리는 정도 밖에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농부의 씨앗입니다. 열매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종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입니다.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서 열매를 이미 보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인내, 기다림이 어찌 에너지가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어찌, 기꺼운 마음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용기 백배한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대림절 기쁨의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쁘십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이생의 복들을 누리고 계셔서 기쁘십니까?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 주시는 소중한 기쁨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인내, 기다림에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인내이고 기다림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대한 인내,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기쁨은 인내의 열매입니다.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오는 필연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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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