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18. 12:17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

(요한복음 1:43-51)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 라는 제목을 듣고, 왜 나다나엘이 필요하지? 나다나엘은 누구지?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떤 시대이길래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지? 이런 질문들이 떠올라야 한다.)

 

나다나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ㅡ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전문

 

이 시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껍데기는 가라를 아주 웃기는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살코기만 오라.” 그러면서 먹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를 아는 사람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있는 신동엽의 안타까움에 금방 스며들 것이다. 신동엽이 이 시를 세상에 내놓은 때는 1960년도에 있었던 4.19 혁명 후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탄압, 그리고 억압적인 정치에 맞서서 민주화를 갈망했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사건이 바로 4.19 혁명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고, 박정희에 의한 군부독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면서 어느새 4.19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신동엽은 그러한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시 껍데기는 가라에 담아내고 있다.

 

성경의 인물인 나다나엘과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나는 나다나엘을 생각하며 신동엽의 이 시를 떠올렸을까.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나다나엘의 순교와 관련된 전승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통찰력이 신동엽과 닮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다나엘은 주님을 전하다 순교할 때 피부 껍데기가 벗겨진 채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한 전승을 담은 예술작품이 이탈리아의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바티칸 성 시스티나 성당에 남아 있다.

 

나다나엘의 순교 이야기를 가장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작품은 밀라노 두오모(대성당/dome이 있는 대형성당)에 세워진 마르코 다그라떼(Marco d’Agrage)의 나다나엘 입상이다(1562). 대개 사도들의 입상은 로마시대 영화에서 보듯이 긴옷을 겉에 두른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나다나엘은 겉옷으로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벗겨진 피부 껍데기를 두르고 있다. (아래 사진)

 

 

그보다 25년 전쯤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라는 작품에도 나다나엘이 등장을 한다. 예수님 왼쪽 아래에 위치한 나다나엘은 오른 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자신의 신체 껍데기를 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얼굴까지 신체 껍데기가 벗겨진 나다나엘의 얼굴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자화상으로 채운다.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의 얼굴모습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이다. (아래 사진)



 

복음서에서 몇 군데 밖에 등장하지 않고,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에서는 아예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나다나엘이지만, 그와 관련된 순교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인물이었길래, 이렇게 전승과 전통에서 훌륭한 인물로 기억될까?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읽을 때 그 시가 씌어진 시대적 배경을 알면 그 시를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듯이, 나다나엘 이야기에 묻어 있는 시대적 배경을 알면 나다나엘이 어떠한 인물인지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다나엘이 한 이야기 중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말은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이렇게 나다나엘이 말한 것을 두고, 나다나엘이 나사렛 시골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을까?

 

흔히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질곡(차꼬와 수갑)의 역사라고 말한다. 한국 사람들이 성경의 이스라엘 민족과 정서적 교감이 잘 되는 이유는 한국의 역사도 질곡이 많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질곡은 전쟁의 빈번함에서 온다. 지정학적 위치가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는 곳에 정착하여 나라를 이룬 민족들은 원래 질곡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국이 수없이 많이 북쪽으로는 중국, 남쪽으로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겪었듯이, 이스라엘도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등의 제국들에 둘러싸여 수많은 침략 속에서 질곡을 수도 없이 겪었다. 성경은 그 제국들을 둘러싼 질곡의 역사의 기록이라도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선민이라고 가지고 있었고, 유일신 여호와를 믿는 민족으로서 종교적인 정체성이 굉장히 강력한 나라였다. 그들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큰 어려움을 많이 당했지만, 그래도 근근이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다, 그들에게 불어 닥친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시작된 헬라화(세계화)의 물결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성경에 이 빠진 듯이 기록이 없는 신구약 중간기가 바로 그때이다. 신구약 중간기의 기록들은 대개 외경에 있다. 그렇다 보니, 외경을 성경에 끼워서 함께 보지 않는 개신교인들에게는 신구약 중간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 이야기가 낯설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작년 부활절을 맞아, ‘부활신앙이라는 특강을 통해서 신구약 중간기 때 기록된 외경을 살펴보며, 그들이 헬라화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처절하게 저항했는지를 들여다 보았다.)

 

19세기 말, 조선에도 세계화 물결이 들이닥쳤다. 그때 조선이 얼마나 큰 혼란을 겪었는지, 대한민국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잘 아는 이야기다. (그 혼란을 예술적으로 잘 묘사한 드라마는 단연 미스터 션샤인(Mr. Sunshine)”이다.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에 길이남을 역작이다. 그 드라마를 진지하게 보고 나면, 다른 드라마는 시시해서 못 본다.) 19세기 말 조선 개화기 때 제국 열강의 침략 앞에서 조선 정부(대한제국)는 개화파와 척사파로 나뉘어서 싸웠다. 개화파는 외국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척사파는 외세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스라엘은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 이후에 계속하여 헬라화(세계화) 물결의 위협 속에 살았는데(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그당시 고대 근동의 모든 나라가 헬라화의 위협 속에서 살았다), 그들도 동일하게 개화파와 척사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그러한 헬라 외세의 침입과 헬라화 물결에 반대하여 반-헬라화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헬라화를 원했던 헬라의 제국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진압했다. 그러면서 현실 세계에서 생겨난 사상이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하나님이 보내신 강력한 왕)가 나타나 이 헬라 세력을 몰아내고 옛날 다윗왕조처럼 찬란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워줄 것이라는 소망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는 간절하게 자리 잡았다.

 

헬라 세력을 몰라낼 강력한 메시아가 나타나길 간절히 기다리는 이스라엘 군중의 마음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 당시 수없이 많은 메시아가 출현했었을 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모든 여인은 자식을 낳으면 자기 자식이 메시아일거라는 기대를 안고 있었다. 이는 마치 한국 부모들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공부를 잘해서 아이비리그대학에 들어갈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것과 같았다.

 

그런 정황을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던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뀌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사도행전 5:36-37).

 

빌립이 예수님을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소개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다른 말로 해서, 빌립은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것은, 빌립이 소개하고 있는 예수에 의한 메시아 운동을 아주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메시아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메시아 민족주의 운동은 매우 보수적인 정치운동이었고, 다윗과 같은 메시아, 즉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주의를 통해 외세를 몰아내겠다는 정치전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메시아()를 갈망하여 메시아를 보내주어도 왕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그 왕을 버리고 다른 왕을 찾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 나라를 꾸려가는 왕 정치 제도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다. 결국 왕정 제도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다나엘이 보기에 아직까지 그러한 실패한 왕정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는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심해 보였다. 그 한심한 마음이 담긴 말이 바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이다.

 

다시 말해, 나다나엘은 강력한 왕(메시아)을 세워 외세를 몰아내려고 하는 메시아 민족주의 운동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그 어느 나라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였다. ‘메시아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 무슨 구원인가. (이는 예레미야의 국제정치 시선과 닮았다.)

 

메시아 민족주의 운동은 요즘 말로 하면 포퓰리즘(Populism)’이다.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여 지배자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대중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다. 구원은 없고 구호(예를 들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만 있는 것이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그당시 일반 대중들과 달리 메시아 민족주의라는 포퓰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다.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나다나엘은 무화가 나무 아래있기를 즐겨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아래를 성경을 묵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여겼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묵상하며, 공부하고, 자기를 성찰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포퓰리즘에 휩쓸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간사한 마음이 없었다.

 

실제로,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이스라엘 군중이 원했던 메시아 민족주의 운동에 휩쓸려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신 분이 아니다. 군중들은 한 때 예수를 본인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알고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으나, 예수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길을 걷자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다그쳤다. 그들의 간사한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지금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시대를 오판하는 포퓰리스트들에 의하여 나라가 혼란스럽다. 요즘 방역당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예배를 목숨처럼 여기겠다고 저항하며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세력들의 사상은 기독교 민족주의(기독교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그 외의 세력들은 모두 외세 오랑캐로 보는 시각)’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팬데믹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며, 기독교 신앙을 전할 수도 없다. 오히려 반대의 일만 벌어진다.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세력들 때문에 팬데믹 종식은 느려지고, 기독교 신앙은 사회에서 지탄을 받을 뿐이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절(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시절)에는 나다나엘 같은 영성이 필요하다. 시대를 읽을 줄 알고, 그 시대의 질곡을 돌파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간구하며, 세속(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기를 철저하게 성찰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 중 바돌로매로 알려져 있다. 바돌로매는 바디매오(디매오의 아들)’처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돌로매의 아들이라고 불린 거의 무명의 제자이다.


하지만, 바돌로매는 요한에 의하여 나다나엘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사도로 기억되고 있고, 나다나엘은 어려운 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했으며, 그는 결국 자신의 민족 뿐 만이 아니라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만났다. 참된 구원의 길을 발견한 나다나엘은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참된 구원을 주지 못하는 껍데기들은 가고, 우리를 진정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여 오라!”

 

우리도, 이 어려운 시대에 길을 잃지 않고,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헛된 것에 소모하거나 빼앗기지 말고, 참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나다나엘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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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