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28. 09:35

노인의 탄생

(누가복음 2:22-39)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 우리가 꿈꾸는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누가Luke’는 자신이 데오빌로에게 말한 것처럼 예수에 대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전하는 데 힘쓴다. 여러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그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복음서 중(또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누가는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누가의 시선은 독특한 데가 있다. 그는 남들이 주목하지 못했을 법한 사건에 귀를 기울인다. 예수의 탄생과 세례 요한의 탄생을 병행구조로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목자들을 등장시키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의 이야기에 노인들을 등장시키는 것도 그렇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노인이 등장하는 것은 참 따스하면서도 애절하다. 특히 이것(노인이 등장하는 것)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현대사회는 노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 성탄절이 되면 산타 할아버지덕분에 노인들의 존재감이 다시 살아나 곤 한다. 모든 일자리에 청년들로 채워 넣는 이 시대에, 산타 은 여전히 할아버지가 아니면 안 되는 성역으로 남아 있다. 아직까지, ‘산타 청년이나 산타 아가씨’, 또는 산타 아저씨나 산타 아줌마가 등장하지 않았다. ‘산타라는 고유명사에는 할아버지가 붙어야, 사람들은 안심한다.

 

우리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노인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노인들의 이름은 시므온과 안나이다. 이 두 노인이 등장하는 배경은 유대인의 율법과 관련 있다. 짧은 구절에 두 개의 율법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할례법이고 다른 하나는 정결예식이다. 할례법은 아기 예수와 관련된 법이고, 정결예식은 어머니 마리아와 관련된 법이다. 이 두 가지의 율법이 동시에 지켜지고 시행되고 있다.

 

율법에 의하면, 첫 자식이나 첫 동물, 또는 첫수확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 첫 열매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려면 대속이 필요한데, 그렇게 대속을 해야만 첫 열매로서의 자식(사람)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출애굽 경험 때문이다. 무엇이든 첫번째 것(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을 거둘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길 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삶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이 했던 방식으로 구원된 삶을 고백하지는 않으나, 우리도 주일에 주님께 나아와 예배드림으로 우리의 삶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진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하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주일 예배를 헛드리는 것이다. 구원된 삶을 산다는 것은 복되다. 자신이 구원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의 삶과 그것을 모르는 이들의 삶은 같을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아직 이 거룩한 뜻을 잘 알지 못하여 헤매는 것을 보면 참 마음 아프다. 주일에 나와 주님께 예배드리면서도 아직 구원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이 없다. 많은 이들이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얼마나 동분서주하면서 사는가. 예배는 구원된 삶에 대한 감사이어야 하는데, 그들에겐 예배가 자기 성취를 위한 기복일 뿐이다. 그러니 예배가 축복이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또 하나 등장하는 의식은정결예식이다. 정결예식은 레위기 12장에 나오는데, 모든 산모는 아이를 낳은 후 산혈로부터 깨끗해지지 않으면 성전에 접근하거나 성물에 접촉할 수 없다. 산모는 일정 기간이 지나 성막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1년된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혹은 형편이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정결케 되어야 제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제의에 참여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아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정결예식의 시각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정결예식이 말하고 싶은 것은,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풍성히 누리려면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생명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풍성하여 지고, 생명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생명의 부여자인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려면 정결해야 한다. 정결치 못한 자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래서 생명의 풍성함을 갈망하는 자는 정결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없다. 현대인들은 생명의 풍성함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다. 사람들이 이번 성탄절을 유독 힘들어한 이유가 무엇인가? 마음껏 소비하지 못해서 그렇다. 현대인들은 마음껏 소비해야 생명의 풍성함을 느끼는데, 소비를 못하니, 생명이 쪼그라든 것처럼 느낀다. 현대인들에게는 정결한 사람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정결과 상관없이 돈 많은 사람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성탄절은 오히려 더 생명이 풍성한 성탄절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마음껏 쇼핑할 수도 없고, 어디 갈 데도 마땅치 않으니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고요한 가운데,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요란을 떨었지만, 많은 부분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아니었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기 예수와 산모 마리아를 위한 제사를 위하여 그 가족이 모세의 율법대로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곳에는 두 노인이 있었다. 모세의 율법대로 각종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그 많은 이들이 다녀가는 곳에서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일생을 보내던 두 노인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부자들, 권력자들, 젊은이들, 성직자들 등, 예루살렘을 드나들었을 수많은 사람들 중에 노인이었던 시므온과 안나만메시아를 알아보았다.

 

누가는 시므온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한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5-26).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이 소개 글에서 시므온의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위로가 없던 시절,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실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우리에게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 있는가? 그 간절함이 성령의 감동을 가져왔고, 그 간절함과 성령의 감동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성전에서 메시아 예수를 알아보게 했다.

 

누가는 안나를 이렇게 소개한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여 기도함으로 섬기더니”(36-37). 안나가 아셀 지파였다는 것, 그가 과부였다는 것은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아셀은 북이스라엘의 지파였다. 7년간 남편과 살다 남편이 죽은 뒤, 재가하지 못하고 평생 과부로 살았다는 진술에서 그의 아픔이 엿보인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메시아 예수를 알아본 시므온과 안나, 이 노인들의 행보는 매우 고무적이다. 노인의 가치, 노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이들의 등장을 통해서 노인의 탄생을 본다. 노인은 나이를 먹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의 가치는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노인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노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을 생산력의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흔히 정상인, 그리고 젊은이에 비해 노인과 장애인은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저급한 것이다. 유교의 효사상이나 어른공경 사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교의 효사상이나 어른공경 사상이 공격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관계에서 상하관계를 만들어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다른 측면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이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차별한다. 나쁜 사회다. 옛날에 우리 동네에 발달장애 형이 있었다. ‘용마형이라고, 온동네 돌아다니면서, 모든 일을 참견했다. 그런데, 그 형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동네 형으로서 서로 존중하며 어울려 놀았다. 그런데, 요즘 그런 발달장애인은 시설에서 가둔다. 이상한 세상이다. 노인들도 실버타운으로 가둔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장애인이나 노인들에게 막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은 장애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자신들은 노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우리가 잃고 사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그냥 노인이 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인은 나이를 먹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은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이었던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권력을 가지려 노력하고, 젊어지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는가?

 

우리는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산다. 얼마전 작업을 하다 우연히 지난해(2019) 마지막 날 페북에 올린 사진과 글을 보았다. 맑은 하늘 사진과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 하늘~ 2019년 마지막 날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의 하늘~ 너무도 행복했던 2019년이 다 지나갔다. 내년에는 어떤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열심히 십자가를 지고 가야지!^^” 나는 나에게 2020년 어떠한 십자가가 기다리는 줄 전혀 몰랐다. 팬데믹이 기다리고 있을 줄 전혀 몰랐다. 올해, 우리는 모두 팬데믹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왔다.

 

우리는 사실 젊은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으로 산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법대로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갔지만, 그들의 인생에, 그리고 그들이 지금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첫 아이 예수에게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그 부모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알려준 것은 두 노인이었다. 그들은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려주었고, 이 아이가 어떠한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알려주었다. 두 노인은 이 아이의 젊은 부모에게 영적 지혜를 알려준 것이다.

 

노인의 탄생.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 우리가 노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던 시므온과 안나처럼, 우리 민족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민족을 넘어 인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는 세대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전달해 주기 위해 성령의 감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경건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오는 세대에게 참된 위로를 주는 노인으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들의 지혜를 통해 위로 받는 세상, 그래서 노인들이 존경받는 세상을 꿈꾸고, 세상에 위로를 전할 수 있는 노인으로 탄생하기 위하여,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권력을 가지려 노력하고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인생,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는 인생이 되기를 꿈꾼다. 나이 먹어가는 우리들, 그냥 불가항력적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노인으로 탄생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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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