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16. 04:36

높이 들린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3:14-21)

 

작년 12월 14일 첫 백신접종이 시작된 이래, 연일 뉴스는 백신접종 관련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WHO에서 팬데믹을 선언한 날(2020년 3월 11일) 이후 일년이 지나 그동안 바뀐 인류 역사의 풍경을 보면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중에서 언론사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사람 중, 5명에서 1명 꼴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은 고통에 휩싸이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지난 일년 동안 지구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이 발생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실, 뉴스 기사는 고통받은 이들에 대하여 숫자적 통계만 낼 뿐이지, 그들이 경험한 고통을 직접 보여주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물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고통 지수를 100으로 설정해 놓고, 이번 팬데믹을 통해 많은 이들이 경험한 고통을 95정도로 표현한들, 그 고통의 숫자가 고통 당하는 이들의 실제 고통을 전혀 전달해 주지 않는다. 고통은 통계가 아니고 계량화할 수 없는(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범죄도 결국 팬데믹 동안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표출이다. 팬데믹 동안 이래저래 억압된 감정을 나쁜 방식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서, 민수기 21장에 소개되고 있는 ‘불뱀 사건’을 떠올려 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상할 때마다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으며 ‘반출애굽 주제(anti-exodus motif)’를 꺼내 들었다. 불뱀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야 길을 걷는 것이 가뜩이나 험하고 힘든데, 에돔 땅을 우회해서 갈 생각을 하려고 하니 그들의 마음이 상했다.

 

마음이 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한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 21:5).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칭하는 것은 ‘만나’이다. 광야에서 굶지 않고 만나를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찮은 것이라 폄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비난한다.

 

팬데믹 기간 동안 혐오 범죄를 비롯해 각종 범죄를 범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런 것이다. 미국에서, 거의 3천만명 되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53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팬데믹 가운데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인데, 죽지 않거나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아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혐오 범죄를 일으킨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불경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죽은 자가 그렇게 많고, 병원 신세를 지는 자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풍경을 TV를 통해 연일 보는데도 불구하고, 혐오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만나를 하찮게 여겼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불경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 팬데믹 시대에 병원 신세 안 지고 이렇게 건강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디에 이렇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죽은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몸이 조금이라도 더 성하거든,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고통을 헛된 것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혐오 범죄’ 같은 죄악을 저지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은 니고데모와 예수님 간의 대화 속에 담긴 말씀이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은 명백하게 위에서 언급한 민수기에 등장하는 ‘불뱀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민수기 21장의 불뱀 사건은 참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 놓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시고, 불뱀에게 물려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그에 대해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자, 하나님은 놋뱀을 장대에 달라 높이 세우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모두 불뱀에게 물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신다.

 

이것은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낯선 이야기이다. 누군가 성경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놓은 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것을 쳐다보면 바이러스가 낫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을 정말로 믿고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놋뱀을 쳐다보기 보다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비난이 먼저 쏟아질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우리 시대의 복음은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로 기독교는 숫자적으로 쇠퇴하고 있다(숫자적 쇠퇴가 곧 기독교 복음의 쇠퇴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 우리들은 바보들인가.

 

놋뱀 사건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연결시키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되는 것 같다가도 이내 미궁에 빠지고 만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의 수난을 이미 예고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에서 ‘들림(휩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들려지는 고난’을 말함과 동시에 ‘높이 들려 존귀하게 되는 영광’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들려야’ 하는가?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들림’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를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과학시대를 사는 이들을 오히려 실족시키는 미신을 생산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들림은 미신이 아니라 복음이다. 예수의 십자가 들림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려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들의 ‘영생’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우리가 영생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생은 양적 구원이 아니라 질적 구원이라는 것이다. 영생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육신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생명의 질적 변화이다.

 

그 질적 변화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첫 이야기로 배치해 놓았다. 양적 구원은 물이 계속해서 불어나는 것을 말하겠지만, 질적 변화는 물이 계속해서 불어나는 게 아니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생명의 경험이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 자체를 ‘믿음’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들림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한다.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모세가 장대에 높이 매단 놋뱀(구리로 만든 뱀) 자체에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구원의 능력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믿음은 우리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게 한다. 놋뱀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하지만 놋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작동하는지, 1972년 남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얼라이브(1993년 상영)’를 통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우루과이의 한 대학 럭비 팀이 시합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다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한다. 승객과 승무원 포함해 45명이 타 있던 비행기의 추락으로 인해 16명만 살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는다. 식량이 얼마 없던 터라 눈 덮인 안데스 산맥 위에서 살아남은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사의 위기에서 그들은 72일을 버텼는데, 식량이 다 떨어지자 결국 죽은 이들의 살을 떼어서 먹었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는 안 나오는데, 나중에 생존자들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인육을 먹을 때 어떠한 마음가짐이었는지 밝히는데, 그들은 인육을 먹는 것을 하나의 성만찬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죽은 동료의 살이 예수님의 살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남미에는 가톨릭 신자가 많은데, 그들이 가진 가톨릭 신앙, 성만찬을 예배의 중심으로 두는 신앙이 동료의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거룩한 성만찬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들은 동료의 인육을 동료의 인육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살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믿음’인 것이다. 동료의 살을 예수의 살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인육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먹었더라도 그들의 삶에 어떠한 감사가 있었겠는가.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동료의 살을 먹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감사하며 살았다.

 

지금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백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일 뉴스에서는 백신을 장대에 높이 매달아 백신을 맞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선전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백신을 맞으면서 백신을 만든 제약회사가 구원해 준 것인 양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백신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공짜로 투약해 주는 국가가 자신들을 구원해 준 것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구원 사건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알 것이다. 백신 접종을 앞두고 그 백신 접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놋뱀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은 복되다. 백신 접종을 마친 후, 그것을 놋뱀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얼바이브 영화의 실제 주인공들처럼 자신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원 사건을 ‘성만찬’화 시킬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구원 행위는 모두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현실, 삶의 현장에서 구원을 바라거든 언제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삶의 현실, 현장에서 구원을 경험했거든 그것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믿음으로 살 뿐만 아니라, 은혜와 감사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또한 믿음으로 살고, 은혜와 감사 가운데 사는 사람은 본인이 행하는 모든 일이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헤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고 구원이 되는 일이 되도록 선하게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절). 그러니 우리, 부지런히 구원을 간구하고, 또한, 부지런히 구원을 베푸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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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