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14. 11:03

누가 공인(公人/public figure)인가?

(에베소서 1:1-14)

 

나는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얼굴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얼굴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인기인’이지 ‘공인’이 아니다. 공인이란 공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널리 인기가 있을 뿐이지 그들이 하는 일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사적인 일이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이지, 대중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면 누가 공인인가? 연예인이 공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공무원을 공인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공무원을 공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무원은 국가라는 제한된 차원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뿐이지, 존재의 보편적 차원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공인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공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말씀은 왜 그리스도인이 공인인지, 그리고 공인이란 무엇인지, 공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公人)’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자기 인식이 꼭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이 되는 것이라는 자기 인식이 흐려지면,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익집단(이익집단/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집단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으로 추락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있는 바울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것은 바울의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우리는 바울의 이름 논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은 바울의 이야기를 은혜롭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을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바울은 히브리 사람이다. 히브리 사람으로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인으로서 바울은 로마식 이름(Roman surname)인 ‘바울(파울로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고정해서 사용한 이유는 그가 예수의 부르심으로 인해 ‘작은 자’가 되어서 겸손의 표현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사명 때문인데, 본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이름인 ‘바울’을 사용한 것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삶을 공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그가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선포였던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지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동안에 그와 함께 있었고, 또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가리킨다(행 1:21-22; 고전 15:4-5).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다른 열 두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동행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바울의 등장은 성령강림절 후, 예수님의 승천 후,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해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 칭한 것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때문에 그렇고, 무엇보다도, 그 체험으로 인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즉, 자신의 삶이 사사로운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공적인 삶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사도’로 부른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공인’이다. 그는 더 이상 개인의 사사로운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의 인생, 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행동이나, 그가 하는 말은 사사로운 개인의 말, 행동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적인 말, 공적인 행동이 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안에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공적으로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라는 특수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삶이 공적인 삶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바울의 이야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편지의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을 표현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바울이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부르는지 보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헬라어 원문에는 ‘편지하노니’라는 말이 없다. 이것이 그냥 편지이기 때문에, ‘편지하노니’라는 말을 덧붙인 것 뿐이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성도’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하기오이/saints)’라는 뜻이다. ‘거룩한’이라는 뜻은 도덕적으로 성결하다는 뜻이 아니다. ‘거룩한’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거룩한 무리’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무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가 거룩한 무리라고 불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때문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과 관련된 용어이고,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인간인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사사로운 개인의 삶을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생득적으로 ‘공인’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에 ‘관계(relationship)’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적 용어, 관계적 삶, 공적인 삶을 낯설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인의 삶, 사사로운 삶’을 강조하고, 그것이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어 놓고 고립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공공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 알고 그것을 강화시키지, 자기의 삶을 공적인 삶으로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삶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다니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발생하고 있는 슬픈 현상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을 ‘성도’라고 부르는 동시에,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신실한 자들’이라고 번역된 ‘피스토이’라는 헬라어는 수동적 개념으로 ‘신뢰할 만한’이라는 뜻도 있고, 능동적 개념으로 ‘신뢰하는’이라는 뜻도 있다. 수동적인 개념을 생각해 보면, 성도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거룩한 무리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서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교회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러한 신뢰 없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겠는가. “나는 여러분을 신뢰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우리는 서로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지난 달에 한국갤럽에서 한국종교에 대하여 여론 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17%, 불교 인구는 16%, 가톨릭 인구는 6%로 집계됐다. 무종교인은 60%로, 한국갤럽이 조사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무종교인 중 82%가 말하기를 ‘종교는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호감가는 종교는 불교가 20%, 가톨릭이 16%, 그리고 개신교가 6%였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이 ‘공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스스로를 ‘공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자들(피스토이)의 능동적 의미는 ‘신뢰하는’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냥 신실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믿음은 관계적 용어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삶을 사사롭게 개인적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관계적 삶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계적인 삶, 공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은혜와 평강(grace and peace)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 ‘은혜(카리스)’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혜가 주어지면, 우리에게 평화가 임한다.

 

성서학자들은 개정개역에서 ‘평강’이라고 번역된 우리말을 평화(에이레네)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강’은 개인적이며 내적인 평안을 말하는 것인데, 히브리어의 ‘샬롬’을 표현하고 있는 헬라어의 ‘에이레네’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평안을 넘어 관계적 의미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적 평안을 나타내는 우리말은 ‘평화’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는 관계적 평화를 이룬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너와 나 사이의 관계적 평안’이 임한다. 그렇지 않은가? 값없이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값없이 베풀지 않겠는가? 그렇게 서로 값없이 베푸는 관계에는 텐션(tension/긴장감)이 흐르지 않고, 평안이 흐르는 법이다.

 

그러나, 이 은혜와 평화의 가치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형편없이 무너져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의 열매로 생각하려 한다. 열심히 일해서 내가 모은 재산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간 것이고,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것이고 등…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자기의 성취에 근거한 것이고, 그래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야 사랑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그렇다. 자녀가 부모의 자랑이 되어야 자녀는 사랑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성장하면서 상처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차별비교경쟁 속에서 서로 간의 관계적 평화를 잃어간다.

 

이와 달리, 거룩한 삶, 신실한 삶, 공인으로서의 삶(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한 삶일까? 그것은 3절 이하에 등장하고 있는 ‘영광송’이 가르쳐 주고 있다. 바울은 편지의 시작을 ‘영광송’으로 하고 있다. 공인으로서의 삶은 영광송(doxology)을 드리는 것이다. 영광송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3-6절은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 선택과 예정(계획하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고, 7-12절은 성자 하나님이 하신 일, 구속(redemption)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고, 13-14절은 성령 하나님이 하신 일, 인치심과 보증(성령 하나님이 성도들 안에 내주하신다: 구원의 완성과 풍성한 삶에 대한 보증)에 대하여 영광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이제 공인으로서의 삶이 된 것은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에 관계적으로 엮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이제 개인적인 사사로운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간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제 더 이상 사사로운 개인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영광송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일상의 언어가 모두 기능어로 전락하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을 지적하는 학자가 있다(<After Writing>, 캐서린 픽스톡). 우리 일상언어를 보면 서로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언어만을 쓸 뿐이다. 작업지시언어. 마치, 컴퓨터의 자판처럼 무엇인가를 기입하고 나서 엔터를 치면, 그것대로 실행하는, 기능어 말이다. “빨리와. 밥먹어. 공부해. 피아노쳐. 밥차려. 설거지해. 씻어. 문닫어. 불꺼. 컴퓨터 그만해. 운전해. 전화해. 예약해. 빨리자. 일어나. 등등등” 이런 기능어 외에 우리는 어떤 언어를 쓰고 사는가?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언어인가? 서로를 찬양하는 언어인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언어인가? 서로를 세워주는 언어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서로에게 쓰는 언어는 너무너무 기능적인 언어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제 ‘공인’으로서 기능어를 쓰지 않고 영광송(doxology)의 언어를 써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속에 은혜와 평화가 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그리스도인의 공적 삶이 너무도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 기능어만 사용하다 보니, 관계가 메말라 있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끼리 너무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사람은 자연을 착취하고, 자연은 사람에게 반격하여 해를 입힌다. 평화가 없고, 근심과 걱정과 절망과 한숨만 늘어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을 치유하라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누가 공인인가? 연예인이? 공무원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공인이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성취하신 구원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되고, 그 구원이 종말까지 보증되는 우리의 삶은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능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상처주고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워주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해를 입히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공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찬양하는 언어, 감사하는 언어, 세워주는 언어를 쓰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들로 인하여 생명이 더 풍성한 세상이 될 거라 믿는다. 공인으로서의 그 거룩한 삶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자.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