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2. 06:59

리추얼의 탄생

(출애굽기 12:1-14)

 

(무력감. 이것이 지난 한 주 내가 느낀 감정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수많은 갈등에 휩싸여 고통 당하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서 ‘전쟁’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아 분노가 치밀고, 한국은 대선 정국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운데, 미국에 사는 우리 한인들은 그 혼란스러운 정국을 코로나 사태 중에 두 번이나 맞이하니, 스트레스 지수가 더 높은 것 같다. 윤동주도 일본 유학 가서 조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무력감을 느껴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그의 무력감은 <쉽게 씌어진 시>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곳 건너편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는데, 우리는 전쟁에 대하여 약간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따스한 밥과 국 먹고, 따스한 물로 목욕하고, 따스한 잠자리에서 잘 잔다. 무력감. 어찌해야 할까. 이러한 때에 설교해야 하는 것은 참 어렵다.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은 한 주간이었다. 그래도 힘을 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안에서 주님의 위로와 평화를 간구해 본다.)

 

1. 출애굽기 7장부터 10장까지 숨 고를 틈 없이(물론 실제로는 시간 간격을 두고 발생한 일이겠지만) 첫 번째 재앙부터 아홉 번째 재앙까지 단숨에 펼쳐진다. 그런데 열 번째 재앙은 좀 다르게 전개된다. 아홉 번째 재앙과 열 번째 재앙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한다. 그 간격 중간에 나오는 것이 바로 유월절과 무교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유월절과 무교절에 머물 수밖에 없다. 열 번째 재앙은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묵상 없이 맞이할 수 없다. 이 묵상을 통해서 열 가지의 재앙은 단순히 재앙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의 이야기로 승화된다.

 

2. (본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또는 형성하게 된 어떤 사건이 있는가 /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 모세: 다른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갈 때 본인은 물에서 건짐을 받은 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체성은 출애굽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이전의 이야기들, 특별히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는 ‘나라’가 형성되기 전 족장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 스케일이 다르다. 이제는 족장의 규모가 아니라 한 나라의 규모로 이야기의 규모가 바뀐다. (애굽에서 너희 ‘군대’를 내가 이끌어 내었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출애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그들의 근본적인 토대이다.

 

3. 유월절 규례가 등장하는 12장의 첫 번째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2절).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새해’를 규정해 준다. 유월절 사건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달력은 시작한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시간)는 유월절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연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유월절 사건이 발생하는 날은 ‘오늘부터 1일’이 되는 날이다.

 

4. 한국인은 새해의 첫 달을 ‘1월’로 부른다(너무 단순화된 듯. 뭔가 부르는 고유어가 정착했으면 참 좋았을 것을). 영어로는 January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새해 첫 달을 ‘아빕(אָבִיב, Abib)’이라고 부른다. 이는 ‘어린 이삭, ‘새로운’이라는 의미로, ‘첫 달’을 의미한다. 12장에는 유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자세히 나와 있는데, 유월절 어린 양은 열흘(아빕월 10일)에 취하여 사흘(3일) 동안 기다렸다가, 나흘(4일째)째 되는 날 해 질 때 잡아 먹는다. 양을 잡아서, 잡은 자의 피는 집 현관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양을 불에 구워서(날 거로 먹으면 안 된다) 먹을 때 고기만 먹으면 안 되고, 무교병(누룩이 들어가지 않아 부풀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한다.

 

5. 그런데, 유월절 양 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을 먹을 때 그냥 편하게 식탁에 차려 놓고 먹으면 안 된다. 어린 양을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먹어야 한다. 한 마디로, 급히 먹어야 한다. 유월절 어린 양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애굽에 죽음이 난무하게 될 때 그 죽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6. 또한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애굽 땅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며 하루하루 건설 현장에서 고된 부역을 마치고 아무 곳에서나 널브러져 앉아 흙먼지 섞인 음식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히브리 사람들의 쓰디쓴 지난 인생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삶,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의미이다. 열 번째 재앙이 발생하면 누룩을 넣은 빵이 부풀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급하게 출애굽 해야 하는 구원의 순간이 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구원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오는 법이다.

 

7. ‘구원’이라는 말처럼 따스한 말이 있을까.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따스함을 느끼지만, 사실 사랑은 따스하기만 한 건 아니다. 사랑은 잔인하기도 하다. 구원은 참 따스한 말이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이렇게 따스함이 배어 있다. 이스라엘은 구원으로부터 시작한다. 구원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은 이미 구원 안에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어떠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구원으로 시작한 인생은 그 전체가 모두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우리의 인생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신다.

 

8. 출애굽기의 유월절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컬어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마 26:17/ 막 14:13 / 눅 22:7). 요한복음은 예수를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명백하다. 구원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구원의 죽음이라는 뜻이다.

 

9.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마음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이 찬송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구원의 기쁨에 대한 찬양인데, 시각장애인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바디메오의 고백처럼 들린다. 눈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살았겠는가. 그런데 눈을 뜨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바디메오는 구원과 더불어 새로운 인생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10. 이처럼 구원은 새로운 시작인 것이고, 그 이후의 인생은 구원의 인생이 되는 것이기에 그 중간에 발생하는 어떠한 일도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무교절은 단순한 규례나 율법이 아니다. 유월절이나 무교절을 단순한 절기법, 즉 율법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갑자기 고리타분해진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말로 옮기면 ‘리추얼(ritual)’이다. 리추얼은 그들의 인생이 어떠한 인생인가를 잊지 않도록 해준다. 구원 사건과 함께 드디어 리추얼이 탄생한 것이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복음)는 우리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간, 우리가 활동하는 공간은 모두 구원된 시간이고 구원된 공간이다. 복음은 이것에 대한 선포이다.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구원된 것들이다. (고기로 이야기하자면, 익은 고기니까 마음껏 즐기면서 먹으면 된다. 사람으로 이야기하자면, 신뢰할 만한 사람이니까 의심을 갖지 말고 기쁨과 사랑으로 교제를 나누면 된다.) 믿음을 통해 이것을 인식하든(이것을 인식하며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들은 구원된 삶을 산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가진 보편성이다.

 

12.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구원된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구원된 삶을 살지 못하고, 여전히 구원을 갈망하면서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 평화가 없다. 늘 불안과 공포와 분노와 고립과 욕망이 넘쳐난다. 한병철 교수가 최근에 내놓은 책 <리추얼의 종말>은 우리가 얼마나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를, ‘리추얼’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보여준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들여다보자. 리추얼이 있는가. 우리는 리추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우리의 삶 속에 리추얼이 없거나 무너져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구원된 삶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3.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열 번째 재앙이 있은 후 출애굽 한 뒤, 다시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규례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오면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리추얼)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출 13:8-10).

 

14. 부모는 유월절과 무교절의 리추얼을 행하면서(통해서) 자녀들에게 출애굽 사건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전달해준다. 자녀들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리추얼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인생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의 인생은 같을 수 없다. 자신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감사와 찬송과 영광이 끊이지 않는 삶, 그리고 본인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든지, 그것이 본인을 괴롭히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삶이겠지만, 자신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닦달하면서, 또는 자기 삶을 저주하거나 슬퍼하면서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구원된 삶을 살아가기에 인생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불의한 일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 구원된 삶에 악한 것이 들어오는 것을 그냥 놓아둘 수 없기 때문이다.

 

15.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람들에게 던지는 가장 사악한 메시지가 무엇인가. “너희는 구원 받지 못했다. 너희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이다. 세상을 바라보니 마침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메시지는 설득력을 갖는다. 요즘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감정은 불안, 분노, 고립, 욕망이다.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워진 세상, 인플레이션의 압박 때문에 불안한 경제, 게다가 이 어려운 때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구원받은 세상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세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마음은 요동치고 흔들린다. “그래 우리에겐 구원이 필요해. 누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이렇게 요동치고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세상은 파고들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구원해 줄게!” (요즘 넷플릭스가 구원자 아닌가? 에이 모르겠다. 복잡하다. 드라마나 보자. 드라마 보면서 평안을 누린다. 구원이다.)

 

16. 이럴 때일수록 리추얼은 중요하다. 밥 먹기 전에 드리는 기도, 잠 들기 전, 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드리는 기도, 마음이 불안할 때 켜는 촛불, 함께 모여 드리는 공 예배 등,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리추얼은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우리를 고립시키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세상에 맞서,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 듯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 맞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 우리의 삶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선포하며 우상(우리의 믿음을 저하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놓으려 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17. 세상은 우리에게 “너희의 삶은 구원받지 못했어. 너희에게는 구원이 필요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우리의 마음을 차갑게 만든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들은 모두 우리를 낙심케 한다. 그리고 삶을, 미래를 고민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든다. 이럴 때일수록, 촛불을 키라. 무릎을 꿇으라. 십자가를 붙들라(십자가 선물하는 것 – 이번 사순절 프로젝트). 무엇보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라. 리추얼은 어질러진 시간과 공간에 질서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거룩성을 부여한다. 차가운 마음을 다시 따뜻하게 보듬어 준다. 우리의 삶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 삶이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 따스한 마음을 잃지 말자.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군가의 노래  (0) 2022.03.16
자유  (0) 2022.03.13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다  (0) 2022.02.24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야다와 로야다)  (0) 2022.02.15
큰 이야기, 작은 인간, 그리고 믿음  (0) 2022.02.10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