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17. 11:46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후서 6:1-1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1. 어떤 물건을 매뉴얼 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 보니, 그 물건이 가진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거나, 사용하다 잘못해서 고장나게 하고, 또는 매뉴얼대로 사용하지 않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음식도 적당히 먹어야지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원장님한테 배운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아이오다인(요오드)를 먹으면 갑상선 저하증을 치료할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먹을 때도 용량에 맞게, 의사의 지시를 따라서 먹는 게 중요하다. 안 그러면 병을 고치려다 더 큰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2. 디모데후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성경은 신앙의 매뉴얼이다. 신앙도 매뉴얼을 따라 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물건의 매뉴얼을 대충 보거나 아예 보지 않고 물건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듯,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매뉴얼에는 별로 관심 없고 그냥 자신의 감정을 기준 삼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앙이 주는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참 안타까운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절).

 

3. 신앙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 자체를 가져다 준다. 이 진리를 모르는 것도 결국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순간 ‘구원’을 원한다. ‘힘들다. 어렵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낙심된다. 고통스럽다.’ 등등, 우리는 부정적인 환경과 기운 속에서 살아내려고 애쓰고 또 애쓰며 산다. 우리의 삶은 온통 구원의 갈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누가 나 좀 구원해 줬으면 좋겠다!”

 

4.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신앙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구원을 지금 당장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다. 우리가 마음이 답답한 이유, 우리가 사는 게 힘든 이유, 우리가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 우리가 마음을 나쁜 기운에 내어주는 이유는 지금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서 자꾸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물건만 잃어버리고, 정신만 깜빡깜빡 한 게 아니라, 신앙에도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5. 오늘 본문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앙의 매뉴얼에서 벗어나, 아주 한참 벗어나 변변치 못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거울로 보듯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 일행 간의 감정선(tension)을 볼 수 있다. (바울 서신은 뭔가 일이 happen했고 그에 대하여 address 하는 내용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낳는다.) 그 둘 사이(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일단,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을 보는 눈이 조금 삐딱하다. 다른 말로 해서,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다.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니까, 바울이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말이 귀청만을 울릴 뿐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그러한 고린도교회의 강퍅한 마음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6.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대적하게 만드는 바울의 대적자들과는 달리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수고했는지, 그들과는 달리 얼마나 순수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자기 자랑(self-commendation/자기 자신을 뽐 내는 게 아니라, 수사법(레토릭)이다.)을 하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들로 추천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많은 인내와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감옥에 갇히는 것과 난동과 수고와 자지 못함과 배고픔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들로 지냅니다. 또한 우리는 순결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과 모욕,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겪으며 일합니다”(4-8절/우리말 성경).

 

7.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이 신앙생활의 매뉴얼이라면, 이 매뉴얼에 비친 우리의 신앙은 말도 못하게 부족하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굉장히 독특하고 특별하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기복’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잘 따라서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을 ‘기복’의 수준으로 하락시킬 수 있다. (기복: 복만 받기 원하고 십자가가 없는 신앙)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정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선물로 주시는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을 받는다.

 

8.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은 완전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하는데, 바울은 그 다른 차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10절/우리말 성경).

 

9. 기독교 신앙, 그리스도인의 삶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절대자/신)으로부터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공받는 사람이 아니라(기복),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누기 때문이다(십자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친구란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르다. 세상에서는 반대의 일이 발생한다. 진실한 것 같으나 알고 보면 속이는 사람이었고, 유명한 사람 같았는데 보면 별 존재 아니고,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사람이고, 기뻐하는 것 같으나 실은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고, 부유한 사람 같았으나 알고 보니 속이 텅 빈 사람이었고,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으나 빈털터리인 사람.

 

10. 바울은 자신의 겉모습과 실제 모습이 어떻게 다른 지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부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요즘 시대에 바울의 모습은 여러 모로 생각할 것이 많다. 특별히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진정한 부자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정말 부자다. 그의 겉모습을 보면 매우 불쌍한 사람 같지만, 실제로 바울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을 축척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긴 유.무형의 자산을 내어 놓은 삶 말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가 진짜 부자라는 뜻이다.

 

11.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밝히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 사람들이여, 우리의 입이 여러분을 향해 열려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넓게 열려 있습니다”(11절/우리말 성경).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게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개 사랑하지 않으면 입을 닫는 법이다. 상대방하고 말을 섞기 싫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마음이 닫힌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따끔한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러분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스스로 좁아진 것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이 말합니다. 여러분도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십시오”(12-13/우리말 성경).

 

12.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좁아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남 탓 하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여기서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할 때, 마음은 영어로 ‘affections’라고 번역한다. 이건 굉장히 감정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대개 ‘애정, 속이 좁다 깊다’라는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말은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그 좁은 마음을, 그 좁은 이해력을 넓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13. 이런 속담이 있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아무리 잘 생겼어도,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몸/몸매가 좋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마음 좁은 사람 하고는 못사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하면, 그냥 일반 심리학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복음은 심리학 이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왜 그렇게 마음이 좁아졌을까? 바울은 5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체를 따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고후 5:16/우리말 성경).

 

14.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마음이 좁아진 이유는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사람을 육체에 따라 판단했고, 그리스도도 육체에 따라 믿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할 때 아주 쉽게 육체에 따라, 겉모습에 따라, 세상적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 그러나 바울은 더 이상 그렇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그는 사람을 판단할 때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따라 판단한다. 그의 판단 기준이 되는 복음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Christ has died for all)”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몇몇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판단할 때 그들의 외적인 모습(flesh)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15. 우리가 이 복음을 잊어버리면, 우리도 얼마든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마음이 좁아질 수 있다. 그리고 본인들의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좁아진 것이면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 탓을 하기 쉬워진다. 그렇게 좁은 마음으로는, 자기 스스로의 삶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도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하는 바울의 질책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16.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좁은 마음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남 탓 하기 십상이고, 상대방의 진실한 마음과 수고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복음을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넓은 마음’ 안에서 용납하고 용서하고 화합을 이루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도 부요케 하고, 무엇보다 주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워 나갈 것이다. 모든 것은 복음과 그 복음을 붙드는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을 좁게 가지지 말고, 마음을 넓히라. 너무도 따스하고 멋진 메시지다. “복음으로 마음을 넓히라”, 이것이 복음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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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