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부탁해]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가 건강한 어른이 되듯이, 민주주의를 충분히 받고 자란 국가가 건강한 국가가 된다. 사실 국가란 가상의 세계이다. 실체가 없다. 국가라는 게 따로 있고, 그 국가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아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 그게 곧 국가가 된다. 사람이 국가다. 그 거꾸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이념체계이다. 국가라는 허구에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국가가 봉사하는 체계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러한 이념체제 위에서 출발한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시대정신이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활동은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에 일어난 4월 혁명, 1987년 6월에 일어난 민주항쟁, 2016년에 일어난 촛불혁명 등,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의 역사였고 민주주의 세상을 열어보려는 의지의 역사였다. 그 누구도 이 시대정신을 거스를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렸다. 구한말 여러 역사적 사건에 엮이게 되고, 도미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당시 안창호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독립운동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안창호는 어떻게 해서든 독립운동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하여 각 진영 간의 화합을 위해 양보하고 평화를 도모한 인물이었지만, 이승만은 자기 자신을 최고 정점으로 한 정치운동(독립운동)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국가 건설 대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승만의 기질 탓에 안창호는 주변 동료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 자리를 이승만에게 양보한다.

 

민주공화국 건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 견지해온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다. 그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었다. 다른 말로 해서, 이승만은 민주공화국을 설계한 자 중 한명이요 그 이념을 지켜내겠다고 자부하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발하고 초대 정식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행보는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사뭇 달랐다. 한국전쟁을 치를 때 보인 행보며, 전쟁이 끝난 뒤 반공과 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오히려 후퇴시킨 행보며, 장기집권을 노리며 벌인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결국 4월혁명을 불러왔고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 행보가 그렇다.

 

이승만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역사가도 있지만, 대개 이승만에 대한 역사가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역사가들이 이승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반공 프레임과 독재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 붉어지고 있는 '대통령 집무실 논란'을 보면서, 그것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정책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정책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공약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고, 이전 정부와 차별화를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삶이다. 민주국가의 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돌보기 위한 봉사(ministry)의 힘일 뿐이다.

 

누가 봐도 더 긴급한, 산적한 문제가 많다. 코로나 장기화 사태로 인하여 국민들은 지쳐 있고, 비즈니스가 어려워져 폐업하는 업주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고, 역대급 산불피해로 삶의 터전을 몽땅 잃어버려 신음하고 있는 국민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급 비호감과 초박빙 대선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마음이 둘로 나눠져 있다.  

 

이러한 시기에 대통령직에 당선되자 마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대통령실 이전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실행하는 정치행태는 매우 비민주적으로 보인다. 사는 게 어려운 국민을 먼저 돌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집권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려 한다면, 그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면 무리해서 지금 당장 그 일을 시행하려 드는 것보다 임기 내에 필요에 따라 차츰차츰 진행해도 될 일이다. 갑작스러운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따른 혼란과 비용을 최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 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일하는 대통령,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려면 청와대 같은 권력형 청사에서 나와 좀 더 시민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하며 집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당선자의 신념과 고집 보다는 국민적 공감과 합의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는 자이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더불어 잘 살고자 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은 실체이다.

 

국민이나 정권이나 행하는 모든 일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정권을 잡은 자가 민주주의 증진을 위해서 자신의 봉사적 힘을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쓰고 만다면 그는 대한민국 역사에 곱지 않게 기록될 것이다. 얼마나 치욕인가. 역사에 치욕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민주주의가 많이 필요하다. 아직 자유가 충분하지 않고, 평등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이 충분해서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며 사랑하게 될 때까지 민주주의를 밀고 나가야 한다.

 

새로운 정부에게, 민주주의를 부탁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