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21. 12. 31. 05:21

[시론] 박경리의 시 ‘문필가’ – 그래야 그게 설교다

 

붓끝에 / 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 / 그게 참여다

붓끝에 / 청풍을 부르는 소리 있어야 / 그게 참여다

사랑이 있어야 / 눈물이 있어야 / 생명 / 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 / 그래야 그게 참여다

 

ㅡ 박경리의 시 ‘문필가’ 전문, 시집 <우리들의 시간>에 수록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 대한 평론에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일상적 소통을 위해서든 심오한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든 모든 인간이 점차 기능적으로 완벽한 말만을 추구할 때, 말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138쪽).

 

일상의 기능어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 읽기'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기능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사람들의 시는 그나마 읽기 어렵지 않으나, 시는 원래 기능의 언어가 아닌 존재의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다'는 기능어로 읽힐 수 있다. 밥을 먹는 기능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라는 표현은 존재어이다. 현실에서 어둠을 먹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는 말은 '밥을 먹는다'는 말보다 인간 존재를 더 깊이 드러내 주고 보여준다.

 

'시 읽기'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들은 기능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어를 사용한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존재의 언어로 씌어진 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언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도 기능어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박경리의 시 ‘문필가’는 작가의 언어는 어떠한 존재를 담아내야 하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 ‘악을 녹이는 독’, ‘청풍을 부르는 소리’, ‘사랑과 눈물’, 그리고 ‘생명을 다독거리는 손길’이 붓끝에 묻어나야, 비로소 그것이 작가의 글이고, 작가가 세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글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기능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의 언어이다.

 

존재의 언어를 사용하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존재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 존재를 끌어안는 행위와 같다. 낯설기만 한 존재의 언어, 시를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존재의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존재의 언어인 시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존재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언어는 영원히 낯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능어와 존재어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능어는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낯설지 않지만, 존재어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기능어로 담아내기 가장 어려운 존재는 무엇일까? 당연히, 하나님일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절대 기능어로 담아낼 수 없다. 존재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존재어로만 겨우 담아낼 수 있을 뿐이다. 존재어로만 겨우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란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라 말한다. 문득 박경리의 시가 이렇게 바뀌어 보인다.

 

말끝에 / 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 / 그게 설교다

말끝에 / 청풍을 부르는 소리 있어야 / 그게 설교다

사랑이 있어야 / 눈물이 있어야 / 생명 / 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 / 그래야 그게 설교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