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음모론보다 더 무서운 백신 폴리틱스(Vaccine Politics)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마스크를 써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시끄럽더니, 이제는 백신을 맞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시끄럽다. 정부와 다국적 제약회사 주도로 개발된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은 그동안 백신을 만드는데 사용된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mRNA 방식이 그것이다. 새로운 백신의 효능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당국의 말과 새로운 백신에 대한 효능을 불신하는 측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아직까지 백신 효능에 대한 장기적이고 충분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개발된 백신을 맞는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백신 음모론이 아니라, 백신 정치(Vaccine Politics)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하여 지난 1년여동안 전세계는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 반사이익을 누린 집단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는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던 것은 사실이다. 정부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는 백신 정책은 경제를 되살려 놓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펼쳐지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이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에 큰 우려를 보낸다. 그리고 경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백신접종에만 있는 것처럼 정책을 펼치는 것에 또한 큰 우려를 보낸다. 왜냐하면 정부 주도의 정책은 팬데믹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도 없고, 그에 대한 대책도 없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팬데믹의 발생 원인을 중국에서 찾고자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는 정치적 공세일 뿐이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알려졌듯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인간과 짐승이 공통으로 감염되는 바이러스 질병이라는 뜻이다. 인수공통감염병이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은 짐승이 인간 세계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짐승이 왜 인간과 물리적으로 더 가까워졌을까? 인간들이 짐승들의 서식지를 파괴했기 때문에, 서식지가 줄어든 짐승들은 ‘살기 위해’ 인간들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간들과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짐승들은 자신들의 지니고 있는 바이러스를 우연하게 인간들에게 옮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과 같은 대참사를 피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일은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활동을 줄여야 하고, 그동안 망가진 산림을 복구하는데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여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이것을 집행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예만 보더라도 막대한 구제금융지원은 현 상태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 인간들의 활동을 줄이고 망가진 살림을 복구하는 데 편성된 예산이 전혀 없다. 아예 그런 발상 자체가 없다.

 

소포클래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 무대의 배경인 테바이에 역병(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역병이 돌게 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하여 외삼촌 크레온을 델포이에 파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크레온이 받은 신탁, 즉 역병이 돌게 된 이유에 대한 신탁은 오이디푸스 왕 이전의 왕, 즉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가 누군인지 알고 있다. 바로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었다.

 

요즘은 종교가 죽은 개 취급을 받고, 과학이 우대 받는 시대라 소포클래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신탁을 받는 일은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요즘은 이성과 과학이 신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과 과학이 신탁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다. 그것이 근대의 인류문명이 이룬 성과 중의 하나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그 이성과 과학이 어떻게 쓰이느냐이다. 이성과 과학이 ‘합리성’을 가지고 공정하게 쓰인다면 문제 없겠지만, 이성과 과학은 그 옛날의 종교적 신탁처럼 정치에 쓰이는 게 문제이다.

 

현대사회에서 이성과 과학이 정말 올바른 신탁의 역할을 감당하려 한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원인과 그 해결방안을 정직하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성과 과학 가라사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원인은 바로 인간들에게 있나니, 생태계를 혼란시키고 파괴할 정도로 과도한 소비생활을 줄이고, 그동안의 과도한 욕망을 회개하고, 무너진 생태계를 복구하는데 그동안에 쌓은 경제적인 부와 기술을 쏟아부으라. 그렇지 않으면, 곧 영원한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라.”는 신탁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와 국가 정책은 오직 지금까지 누려오던 풍요를 지속시키고자, 팬데믹 속에서도 경제를 유지하고, 팬데믹 이후에 더 큰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정책들로만 가득하다. 그것을 위해서 ‘백신접종’만이 오직 구원의 길 인양 시민들을 호도하는 국가의 정책이 백신 음모론보다 더 무서운 것 아닌가. 우리 몸에 이미 바이러스를 물리칠 수 있는 면역체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자연적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국가적으로 홍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본을 경제살리기에 투자할 것이 아니라 팬데믹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생태계 복원에 투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신 음모론에 의해서 백신을 맞지 않게 되면 집단 면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 그리고 백신 음모론에 휘둘려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비난, 그리고 백신 음모론에 휘말리는 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합류하는 멍청한 짓이라는 정치적 조롱 등은 모두, 우리가 얼마나 자본주의와 그 체제를 유지하려는 국가 정책에 저항없이 따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사증거들일 수 있다.

 

나는 백신 음모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더 거북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경제논리에만 매몰돼 이 시대의 진정한 ‘신탁’에 눈과 귀를 닫고 있는 지배자들과 그들을 무조건 따르는 피지배자들의 사악함과 무기력함이다. 팬데믹 구제금융 정책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해오던 소비를 멈추지 않고 할 수 있어 안심이고 즐겁고 기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로 그 끊임없는 소비 때문에 생태계는 더 망가지고 서식지를 잃은 짐승들은 물리적으로 인간들과 더 가까워져 앞으로 어떠한 인수공통감염병이 또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더 두렵다. 누가 이 두려운 미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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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