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21. 09:21

사랑은 가능한가?

(누가복음 1:46-55)


정말 훌륭한 사상가들은 자신이 그러한 말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훌륭한 사상가들의 공통점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근대사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빨간서적의 대표적 인물, 카를 마르크스(칼 맑스)자본론같은 책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도 마르크스 때문에 격동의 세월을 보내서 그런지, 마르크스를 공산주의자(빨갱이)’라고 치부하지만, 그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때문이다. 그 이유가 엄청 쇼킹하지 않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그렇게 비판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인간들의 사랑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그러한 상황을 나와 너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 놓았다. 사랑을 하려면 나와 너(Ich-Du/I-Thou)’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인들의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에 있으면 폭력이나 착취를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폭력과 착취를 하나.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는 폭력과 착취가 발생한다.

 

현대사회를 공동체라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동체란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이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서울 쌍문동 한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그들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기쁨과 함께 나누면서, 서로 보듬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TV 드라마에서 그러한 시절을 추억하는 이유가 뭔가? 그러한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가 눈물을 훔치는 이유가 뭔가?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찾아보기 힘들고, ‘나와 그것의 관계만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나와 그것의 관계. 그냥 상대방에게서 내가 원하는 이익만 취하면 되는 관계. 얼마나 삭막한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이 시대, 그래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텐데, 그래야 인간이라는 의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텐데,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사실, 그 어떤 문제보다 절실한 문제이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우리는 네 번째 촛불을 켜는데, 사랑의 촛불을 켠다. 사랑의 촛불을 켜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일명마리아 찬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마리아 찬가는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한다. 자기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음에도,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게 단순히 그녀가 메시아를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다. 메시아 잉태 사건을 통해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처음 고백은 이렇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48).

 

우리는 사랑 받을 때 자신을 귀하게 느끼고, 사랑 받지 못할 때 비천함을 느낀다. 몸에 값비싼 것을 두르고 있을 때 자신을 귀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몸에 값비싼 것을 두르고 있는 자기 자신이 그것을 더 잘 안다. 대개 인간이 허영을 부리는 이유, 그래서 외적인 것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려는 이유는 누군가로부터(또는 마땅히 사랑 받아야 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귀함과 비천함은 결코 외적인 것에서 오지 않고 사랑에서 온다. 사랑 받으면 들꽃도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래도 다이아반지가 좋다는 사람은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리아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메시아 잉태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섰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마리아의 찬양은 마음(영혼)에서 울려 터지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쁨의 노래인 것이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현대인들은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나와 그것의 관계에만 머물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가 없는 것이고, 마음이 늘 공허한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 그것의 관계에 머물러,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이익만 얻고 말려 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매순간, 삶의 자리에서 사랑을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대면한다는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고, 사랑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자꾸 사랑을 묻지 못하게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게 하고, ‘나와 그것의 관계에만 머물게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에 굴복하면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는 날까지, 사랑을 물어야 한다.

 

훌륭한 사상가, 훌륭한 신학자는 모두 사랑을 물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이런 데 있지 않았다. 정말 모든 사상가들, 그리고 우리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사랑에 대하여 물었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이론도, 모두 사랑에 대한 질문이고,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이다. 이것을 묻지 않는 사상가는 좋은 사상가가 아니다.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비판, 이것이 모든 사상가들의 책이다. (어떠한 책을 읽을 때 이 원리를 참고하면 좋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 불리는 어거스틴도 당연히사랑에 대하여 물었다. 그가 인생의 말년에 쓴 대작, “삼위일체론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기 시작하면 사랑 자체가 사랑받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어거스틴, <삼위일체론>, 8.8.12)

 

사랑이 일어날 때, 사랑하는 자(actor of loving) '자기 자신'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발생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현존하신다. 어거스틴에게서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대단하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고, 그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열렬히 갈망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왜 중요하냐면, 그 이전까지 신학자들은 모두 인간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들에만 집중을 했는데, 어거스틴은 인간과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다. 이 세상의 다른 어느 피조물보다도 인간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또는 하나님 나라)은 무지개 너머 어딘가(somewhere over the rainbow)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깊이깊이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를 자기사랑/교만(self centered-ness/amor sui)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을 향하는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을 더 가로막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밖(이웃/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구원론적인 정향(orientation)을 가진 사랑이다. 사랑이 구원이다. 사랑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동시에 구원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사랑이 발생하는 곳에 구원이 발생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구원자시라는 뜻과 같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떠한 일에서든 사랑이 발생하지 못하게 한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 발생하면, 거기에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발생하면, 모든 게 완전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거기에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발생되기 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이익이다.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이익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조이다.

 

마리아 찬가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은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51-53).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 ‘권세 있는 자’, 이런 자들이 누구냐면,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구원이 발생하면, 자신들의 이익이 없어지기 때문에, 구원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계속 이익만 발생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팔의 힘으로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구원이 필요한 자,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먹이시는 분이다. 그리고, 부자, 즉 구원이 발생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신들의 이익만 취하려는 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시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그곳에서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미워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하지 못하게 하여 구원을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아주 재밌는 주장을 하나 보았다. 인류가 발명한 것 중,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가 냉장고라고 주장하는 글이었다. 냉장고의 발명으로 인하여 서로 나눠 먹는 사랑이 사라지고, 자기 배만 불리려고 음식을 쟁겨놓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냉장고가 없다면, 보관할 곳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많이 먹으려고 하지 않은 것이고, 음식이 금방 상할 것이기 때문에 이웃과 나누어 먹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레위기 공부할 때 우리가 살펴보았던 제사의 종류 중에 화목제라는 것이 있다. 화목제라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어겼을 때,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화목제의 특징이 뭐냐면, 그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잡은 고기는 그날 다 먹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소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혼자서 다 먹는가? 그날 잡은 고기를 그날 다 먹는 방법은 딱 하나다.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다. 화목제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절실한 질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그분과 같이사랑하면 된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면 된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을 못하게 만드는 이 시대에 우리가 사랑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가 사랑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어서 일까? 아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구원을 발생시키는 사랑을 하지 못하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이익을 발생시키는 가짜 사랑에 머물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자체에 구원을 지니고 있다. 사랑이 발생하면,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 존재하시기 때문에, 사랑이 발생되는 곳에는 동시에 구원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다 죽어도 괜찮은 것이다. 사랑 안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 없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몸/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사랑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냉장고를 없애는 마음으로, 나눔을 늘려가야 한다. 매일의 삶이 화목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누고 또 나눠야 한다. 팬데믹 후에, 홈리스 사역을 하고 싶다. 홈리스들이 와서 조금이라도 쉬어 갈 수 있게, 의자들도 다시 설치하고, 식수기도 정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따스한 밥 한끼라도 나누고 싶다. (홈리스들에게도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기관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홈리스, 그냥 떠돌아다니는 홈리스, 전혀 소통이 안 되는 홈리스, 떠돌아다니는 홈리스들과 소통이 안 되는 홈리스들이 잠시 와서 밥 먹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렸던 예수의 급진적 사랑이 더 절실한 시대이다. 우리에겐 예수가 필요하고, 예수를 사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래도 인간이 아직까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인간의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못해서 구원이 영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고, 그 구원의 경험은 계속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우리 삶 가운데, 날마다 사랑을 발생시켜, 구원을 이루어, 마리아처럼 마음(영혼)에서부터 흘러 터져나오는 찬송이 넘쳐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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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