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3. 2. 00:43

시편 13

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인의 처지는 처절하다. 이 짧은 구절에서 어느 때까지를 네 번이나 외치고 있다. 한계상황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벼랑 끝에 섰다는 뜻이다. 이건 외적인 환경에서도 끝까지 왔다는 뜻이고 영적인 면에서도 끝까지 왔다는 뜻이다. 이런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끝까지 왔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서지 않는다. 그 환경에 얽매이고 매달려 육체의 고통만 당하고 있을 뿐, 참 구원을 위해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고 죄악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영적인 절박함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박함은 그냥 오지 않는다. 이 절박함 안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것이 그냥 저절로 오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시인의 간구를 보라. 한계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라. 우리는 보통 기도하기를 우리의 원수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수를 이기려는 의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싸워 이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시인은 원수로 인한 인내의 한계상황에 다다랐을 때 그 문제 갇혀 좌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있다. 시인의 간구는 이것이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왜 시인은 자신의 눈을 밝혀달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조설화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밝아짐을 죄악을 향한 것, 세상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 시대도 이것을 부추긴다. 세상에 눈이 밝아져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의 삶을 발맞추려고 욕심을 극대화시킨다. 세상에 눈이 밝아지면 나 밖에는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바알신앙을 갖게 된다. 이런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바알신앙으로 타락시킨다.

 

시인의 간구는 이와 다르다. 시인은 원수의 조롱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 밖에는 없다는 것을 신앙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눈에 빛을 주셔야, 즉 영적인 눈을 주셔야 원수를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바로 이거다. 참된 문제 해결은 나를 짓누르는 외적인 환경이 나에게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두 절에서 외적인 환경에 평안이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한 원수의 조롱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 즉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다. 원수의 조롱이 들리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보이는데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