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3. 2. 00:45

시편 15

윤리를 넘어 칭의로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은 일상은 없다. 자는 것, 먹는 것, 쉼 쉬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죽는 것까지도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하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시편은 제의전승으로 분류되는 시인데,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누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개 제사법은 외적인 형식을 주로 취급하는데, 이 시는 제사와 관련해서 윤리적인 면을 취급한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첫째로 시인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윤리적 조건으로 정직과 진실을 제시한다. 사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정직과 진실에서 멀다.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최초의 인간 아담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그 안에 거짓과 속임수가 꿈틀댔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겪는 일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 하고 속인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안에 이미 거짓말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어려서부터 윤리적인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고 해도 잘 교정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은 늘 거짓말 하고 속인다. 시인은 이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답게 정직과 진실을 보이는 자만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수 있다고 못박는다.

 

둘째로, 시인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윤리적 조건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제시한다. 특별히 입으로 짓는 죄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마음에 들어 있는 생각이다. 생각이 비뚤면 입도 비뚤어진다. 이건 감출 수 없다. 잠깐의 립서비스는 할 수 있지만, 결국 속내는 입술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삶은 교만에서 온다. 교만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가리킨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를 교만한 자라고 한다. 교만만큼 다스리기 힘든 인간의 악한 본성도 없다.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악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둠은 빛이 들어와야 물러나듯이, 교만의 어둠은 그리스도의 겸손의 빛이 들어와야 물러간다. 그러므로 교만과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의 빛을 사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내 안에 비취는 한 교만의 어둠은 발 붙일 곳이 없다.

 

셋째로 시인이 제시하는 윤리는 돈 놀이에 관한 것이다. 돈은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이다. 이 사회는 돈 관계로 엮여 있다.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개인적인 윤리가 아니라 사회윤리로 확대된다. 좋은 사회 시스템과 좋은 법은 바로 이 돈 놀음에 피해보는 사람이 없도록 돈 관계를 잘 정리해 주는 시스템과 법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건전하게 살아가더라도 사회적 제도와 법이 정의롭지 못하면 돈 관계 때문에 고통 받게 되어 있다. 돈으로 상대방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회가 바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윤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윤리를 지닌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만 이건 너무 인간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발언이다. 인간을 일컬어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고, 펄벅은 살아 있는 갈대라고 했으며, 성경은 상한 갈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의 수식어는 각기 다르지만 갈대라는 명사는 똑같다. , 갈대처럼 한 없이 흔들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그만큼 토대가 깊지 못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인간에게 덧입혀 지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갈대처럼 흔들리다 쓰러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생각할 때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윤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덧입혀지는 의로움(칭의), 바로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