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1. 13. 12:49

시편 3편 - 절망에서 희망으로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 적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적 질만한 사람과 적을 지게 되면 그나마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고 살면 되니까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늘 얼굴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과 적을 지게 되면 곤란을 겪게 된다.

 

시편 3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지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 갑자기 대적자, 원수가 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삶의 자리도 절망이고, 인간 관계도 절망이다. 이 절망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윗 왕처럼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탄원하는 것밖에는 없다.

 

우리는 흔히 문제가 발생되면 그 문제에 정신이 빼앗겨 주위를 보지 못한다. 그런데 시편 3편의 시인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은 문제보다 그 문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돌린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것을 실제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일단 문제에 정신을 빼앗기고 문제에 집착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고 분주하다. 나름대로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 즉 문제에 집착한 기도이지 문제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가 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문제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들은 풍월로 하나님을 안다. 서당 개가 3년 동안 서당을 서성이면서 배운 것이 , 이듯이 우리도 교회를 드나들면서 하나님에게는 관심을 별로 갖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눈에 안 들어오고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시편 3편의 시인을 보라. 하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 무엇보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빠져 풀이 죽어 고개 숙이고 있는 나를 일으키시는 분이다. 상상해 보라.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의 비통함을. 모든 것을 잃고 도망가는 그 수치스러움을. 잃을 것이 없는 자도 원수에게 쫓기면 마음이 비통한 법인데, 왕이었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바로 그 비통하고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시인은 시온산을 바라보았다. 그 성산에 자신의 탄원의 기도에 응답하실 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6).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산, 시온산은 갈보리 산에 선 십자가이다. 수치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주관하신다. 살면서 부닥치는 문제들 가운데서 절망하고 있는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십자가 신앙,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찌 절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절망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라. 부활의 주님께서 머리를 들게 하실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8).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