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2. 22. 23:37

시편 7

악인의 절망, 의인의 희망

 

말이 칼보다 무섭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 한 마디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시인은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거짓 고소자들의 무고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 상황을 전쟁에서 쫓기는 것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1). 이제 자신의 결백을 풀어줄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안 계시다. 하나님이 시인의 마지막 희망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댄다. 그러나 그 기댐은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기댐이 아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형편이 어려운 때나 언제든지 시인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시인의 마음은 희망적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기대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의로움이다.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르시고, 불의를 못 참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11). 성질 부리는 것이 아니다. 의분을 내시는 것이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의분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 가운데 날 뛰게 될지를 상상해 보라. 시인이 거짓 고소자들의 무고를 통해 고통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의로움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의로움에만 희망을 걸고 있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의로움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없으면 희망을 걸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기댈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자신의 마음의 정직을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한다. 의는 의와 통한다. 시인은 만약자신에게 고소자들의 무고한 그 죄들이 발견된다면 징벌을 받아도 괜찮다고 맹세하고 있다(3-5).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정직함을 호소한다(10).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한다. 시인은 잉태임신의 은유를 사용하여 악인을 묘사한다. 그들이 행하는 악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듯, 악인은 죄악을 잉태한다. 즉 죄의 씨앗이 뿌려지고 임신해서 배양되고 장성해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죄의 뿌리는 깊다. 우리가 짓는 죄는 지금 당장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내 안에서 길러진다는 말이다. 죄악의 실체가 안 보인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는 죄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원죄이다.

 

죄의 씨앗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씨가 자라나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씨앗을 제거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 죄의 씨앗을 제거하셨다. 이미 뿌려진 죄의 씨앗이 현재까지도 그 실체를 드러내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제 더 이상 죄의 씨앗은 뿌려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고 절망이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의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고 희망이다. 바로 여기에 시인의 감사 찬송이 우리의 감사 찬송이 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