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3. 2. 00:13

시편 8

위기의 그리스도인

 

요즘엔 하늘에 별이 별로 없다.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공해 때문에 안 보일 뿐이다. 공해에 찌든 하늘에 듬성듬성 뜬 별을 보면서 사는 현대인들이 이 시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현대인들은 소박한 별에 관심이 없고,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에 열광한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늘을 온통 덮고 있는 주의 영광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보면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문명과 거리가 먼 시골로 간다. 가로등조차 없는 깊은 산골 일수록 더 좋다. 달 밝은 밤도 피하는 것이 좋다. 칠흑 같은 밤이 좋다. 오직 하늘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별들만 보이는 밤이 가장 좋다. 현대인들은 그런 곳을 애써 찾아 가야 하지만, 시편 8편을 쓴 시인이 살던 시대는 매일 밤 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이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시인은 밤하늘에서 주의 영광을 본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 눈에 보기 좋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온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그의 위엄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그들보다 힘 센 존재가 아니다. 연약하고 겸손한 존재의 상징인 어린아이와 젖먹이. 통쾌한 역전이다. 그야말로 예술이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시인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인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인간 없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 인간을 말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시인이 통찰한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다(5). 이는 창세기의 창조질서가 반영된 진술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뒤 그 지배권을 인간에게 넘겨 주셨다. 게다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 떠 지어졌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지배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확실히 그어야 할 선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신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꾸 이 경계를 무너뜨린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다 보니, 만물을 발 아래 두다 보니 어느새 청지기의 사명은 없어지고 마음이 교만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 스스로 신이 된다. 시인이 시의 처음과 끝을 무엇으로 시작하고 끝맺는지 보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끝맺는다. 시인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기 전에 예배자이다. 예배자는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이다. 주의 영광을 가리는 자는 예배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원수와 보복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늘 이 긴장 관계에 산다. 예배자로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허락 받은 자로서 영화와 존귀의 관을 쓰고 있는 존재이다(5).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위태롭다. 날마다 예배자로 서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만이 이 위기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