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3. 2. 00:35

시편 9, 10

하나님은 심판자이면서 피난처이시다

 

시편 9편과 10편은 함께 읽어야 한다. 이 시편들은 답관식(acrostic Psalms)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각 연이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를 배열해서 쓴 것을 말한다. 글 쓰는 사람은 내용만이 아니라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도 자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알리기도 한다. 내용과 형식이 어울려 빚어내는 언어 예술이다.

 

시편 9편은 감사찬양시이고, 시편 10편은 탄원시이다. 찬양과 탄원이 어우러져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맨날 찬양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맨날 탄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찬양과 탄원은 변증법처럼, 또는 대위법처럼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시편의 내용이다. 시편 9편의 내용은 하나님이 무대 중앙에 서 계시고 악인들이 주변을 서성이는 형국이고, 시편 10편은 악인들이 무대 중앙에 서 있고 그들을 상대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시는 형국이다.

 

눈이 더 가는 것은 시편 10편의 탄원이다. 희극보다 비극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의 심리가 반영된 탓이다. 시인은 애가 탄다. 악인들의 비아냥거림에 속이 뒤집힌다. 악인들이 하는 비아냥거림을 들어보라.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10:4). 악인들이 세상에 판을 치는 이유고, 그들이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다. 그도 그럴 것이 악인들이 대놓고 악한 일을 저질러도 하늘에서 금방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우리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현상이다. 내가 지금 악한 일을 행하고 있다고 해서 당장 나에게 천벌이 내리지는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악인들은 마음이 대담해진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눈이 없나 보다. 하나님은 손발이 없나 보다. 하나님은 세상을 전혀 돌보지 않나 보다. 하나님은 없다.’ 악인들의 악행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가 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은 감찰하지 않으실까?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속담이 있다. 꾀를 내어 남을 속이려다 도리어 그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시인은 악인들의 악행을 이처럼 꼬집고 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9:15). 악인들이 파 놓은 웅덩이와 숨긴 그물들은 참으로 악랄하다. 그것들은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같고(10:9), 거기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다(10:7). 악인들의 횡포에 가난하고 가련한 자들은 넘어진다. 아프게 넘어진다.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감찰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악인들을 그냥 놓아두시는 거다. 그들의 죄값은 그들이 파 놓은 웅덩이와 숨긴 그물들로 인해 그대로 자신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렇게 탄식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는 재판관이지만, 의인들에게는 피난처시다. 그러니까 탄식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이면서 동시에 의인들에 대한 구원인 것이다. 탄식함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탄식함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신다’(10:14). 시인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이유다.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자이면서 피난처이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