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11. 10:37

십브라(Shiphrah)와 부아(Puah)

(출애굽기 1:15-22)

 

1. 21세기는 가히 동영상의 시대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여 자기 자신을 뽐낸다. 다른 말로 하자면, 21세기는 가히 ‘드라마’의 시대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갈망하는 시대, 동영상 드라마가 쏟아지는 시대, 드라마 시청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다. 책을 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동영상을 보는 사람은 넘쳐나고 있다. 옛날에는 “읽은 책 중에 무슨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가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시청한 드라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슨 드라마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2.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이 꽃피는 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4년 여에 걸쳐 방영된 이 드라마는 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청소년기와 함께 했던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스타덤에 오른 패표적인 연예인은 최수종과 이미연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수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다. 최재성과 최수지도 그들 중에 포함된다. 지금 시대 사람들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꾸는 이유는 아마도 드라마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를 하도 많이 보다 보니,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꾸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3. 성경이 문자로만 전달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만약 성경을 다시 써야 한다면, 문자보다는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배포하면 지금 시대에 더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될 거라 생각한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성서 보급을 위해서 이런 거 기획하면 좋겠다.) 최고의 작가들, 배우들, 감독들, 그리고 최신의 촬영기법을 동원하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드라마 형태로 동영상을 제작하여 성경을 다시 재구성한다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어떤 드라마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드라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책 자체를 읽기 꺼려하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성경 좀 읽으라’고 권면 또는 강요한다고 성경을 진지하게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하기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최고의 출연진과 제작진을 투입해 성경을 드라마로 제작해서 시청하도록 권면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성경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4. 이러한 생각이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 모든 성경이 라틴어로 보급되고, 모든 예전이 라틴어로 진행되던 때, 그러나 라틴어를 읽을 줄 알고 알아들을 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던 때, 성직자들이 성경과 예전을 독점하고 있었을 때, 일반 대중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복음)을 알린 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그림(성화)는 ‘가난한 자들의 성경’이라 불렸다. 성경이 비싸서 가난한 자들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림은 직관적으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그것에 대하여 상상하고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에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갔다. 이처럼, 라틴어를 모르는 중세인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성경의 이야기(복음)를 전달했듯이,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세대에게 드라마(동영상)를 통해서 성경을 전달하는 것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아닐까, 화두를 던져 본다.

 

5. 내가 만약 출애굽기를 드라마로 제작하는 감독이라면, 본문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 역에 김태희와 손예진을 캐스팅 하겠다. 그만큼 비중 있게 다루겠다는 뜻이다. 십브라와 부아,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반드시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라, 성경 저자(작가)의 의도이다(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한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15절). 애굽 왕은 보통 ‘바로’라고 표현되거나, 아니면 그 왕의 이름을 거론하여 표기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혀 그러한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출애굽기의 저자(작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애굽 왕’이라고 적음으로써 왕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6. 그러나, 이름 없는 왕과 매우 대조적으로 히브리 산파들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십브라와 부아.” ‘히브리(Hebrews)’라는 용어는 ‘하피루(hapiru)’에서 온 말로 그 당시 이집트 사회에서 ‘하층 계급의 사람들(low-class folks)’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후대에 기억되어야 할 사람은 애굽의 왕이고 전혀 기억될 수 없는 사람은 하층 계급 취급받았던 ‘십브라와 부아’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복적으로 기록한다. 애굽 왕의 이름은 전혀 기억하지 않고, 하층민이었던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게 성경이 가진 멋진 전복성이다. 하나님의 신비.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되는. 놀라운 신비.

 

7.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마주하는 세상은 ‘살고 싶은’ 드라마틱한 세상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드라마틱한 세상이다. 위협적인 왕,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반항하는 산파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게다가 우리는 점점 심해지는 핍박을 본다. 요셉을 모르는 애굽의 새로운 왕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된 노동을 부과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생명 자체를 해하려 한다. 그래서 애굽 왕은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 여인들이 아기를 출산할 때 돕다 그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후, 산파들이 본인의 명령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자, 생명을 해하려는 계획은 국가적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실행된다.

 

8. 쥐는 삶의 질에 대한 바로미터다. 쥐가 시도때도 없이 출몰하는 지역에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한 지역의 삶의 질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다. 쥐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는 도둑 대신 쥐가 드나드는 법이다. 못사는 나라일수록 위생의 문제 때문에 쥐가 들끓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한국이 지금처럼 부유하지 못할 때, 매일 아침 일과 중 하나는 집안에 설치해 놓은 쥐덫에 잡힌 쥐를 집 앞 개울물에 가서 죽이는 것이었다. 매달아 놓은 고구마를 먹으려고 쥐덫에 들어왔다 잡힌 쥐는 개우물에서 어린 아이의 불타는 사명감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지금 본문에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동일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22절).

 

9. 쥐와 같이 하찮은 미물 취급을 당하는 히브리 사람들, 더 정확하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존했을까? 국가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저질러지는 인간말살(genocide) 정책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하층 계급(low-class)’이었던 이스라엘이 생명을 잃지 않은 데에는 ‘보이는 거대한 힘’을 압도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꽃피는 이야기다. 생명이 꽃피는 나무.

 

10.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꽃피는 이야기는 두 가지의 큰 줄기를 통해서 전개된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내재된 생명력, 즉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이고, 다른 하나는 십브라와 부아의 용감하고 지혜로운 행동이다. 우리는 십브라와 부아가 꽃피는 생명에 대해 집중해 보려고 한다.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는 유명한 현대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것은 나치에 의해서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도 대학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다만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일어난 아우슈비츠 대학살이 우리에게 시간적으로 가까운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떠올리게 될 뿐이다.

 

11. 한나 아렌트뿐 아니라 2차대전 때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아우슈비츠 대학살(홀로코스트: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제물을 불러 태워서 드린 번제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대한 반성은 그 사건을 경험했던 20세기의 모든 서구 철학자들에 중요한 과제였다. “왜,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을 깊게 파고 들어갔던 두 명의 철학자가 있는데, 하나는 아도르노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 아렌트이다. 아도르노는 근대성이 만들어낸 이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고, 아렌트는 그 원인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12.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해하는데 있어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만큼 좋은 것도 없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면서 그가 어떤 악마가 아니라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그처럼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 있게 되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언어습관과 그의 ‘생각없음’에 주목을 한다. 그의 언어습관은 매우 관료적(별 생각없이 시키는 일만 하고 상투적인 용어만 사용하는 것)이고, 그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행하는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고, 아주 성실하게 상부의 지시를 따라 행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이런 것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그 사람이 아무런 사유(생각) 없이 행동을 하면 거대한 악을 불러오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속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

 

13. 본문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는 아이히만과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들은 생각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만약 산파가 아이히만 같이 아무런 생각없는 사람이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왕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진행된 학살정책을 통해 자취를 감추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파들은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극악무도한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다.

 

14.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을 꽃피우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진다”(페터 슬로터다이크,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다. 실제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을 때 ‘아니오’를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 오스카르 쉰들러(Oskar Schindler). 그의 일대기는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5. 나는 이 영화를 군대 있을 때 봤다. 하루는 내가 모시던 장군이 밤 늦게까지 안 주무시고 영화를 보시더니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나에게 물었다. “쉰들러 리스트 봤나?” 안 봤다고 대답하니, “꼭 봐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봤다. 그 이후 여러 번 봤다.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쉰들러가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자책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다. 그때 유대인 랍비는 쉰들러에게 감사의 뜻으로 반지를 주며 이런 말을 한다.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그래서 우리 주님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겠죠.)

16.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에 해를 가하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아니오(No)”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반대로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예(Yes)”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예”를 말하는 것에 더 길들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생명을 풍성케 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에 해를 가하고 있는 일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아니오”를 하면 불이익을 보게 되는 경우를 이 세상에서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장대한 출애굽 이야기의 첫 장면에 나오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을 마주하며, 생명에 해를 가하려는 일에 맞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아니오’를 말할 줄 알았던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이 성경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는 것의 뜻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도 그들처럼 혹시 살면서 생명에 해를 가하려는 일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을 향하여 ‘아니오’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17. 일부 사람들에게만 기억되었을지 모르는 쉰들러의 이름이 헐리우드 최고 감독의 손을 거쳐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로 거듭나 수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듯이, 그리고 그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듯이, 언젠가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도 좋은 드라마 또는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드라마 또는 영화를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그들처럼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하여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얻게 되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우리들부터 우리의 삶 속에서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을 기억하며,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말하며 생명을 보듬어가는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한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 이 세상이 좀 더 생명력 넘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꿈꾸고 소망하며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니오!”

Posted by 장준식